나이값을 하는 건지 요즈음 나이 이야길 자주 하게 된다.
지하철 매표소 앞이다.
"보면 알지, 신분증은 왜 보자는 거냐?" '노인'은 잔뜩 성난 얼굴로 젊은 역무원에게 삿대질을 해댄다.
한눈에 알아보고 노인표를 내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데 겉보기만으로는 영 노인 티가 안나는 젊은 노인이 많다는 게 역무원의 고민이다.
"아저씨, 오해받게 되었네요, 경로석에 앉아도 눈총 받겠어요". 난 '아저씨'란 말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허, 그래요?" 그는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싫은 표정이 전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젊어보였다.
그렇다면 젊게 봐준 역무원에게 감사를 드려야지, 왜 성을 내? 묻지도 않고 그냥 표를 내준다면 그땐 진짜 노인이다.
그야말로 서러운 일이다.
대접은 받아야겠고 젊어는 보이고 싶고, 그렇다면 아무 소리 말고 신분증을 내밀고 나이를 밝혀야지, 그게 싫으면 표를 사든지.
난 그래서 정기권을 사서 다닌다.
우선 난 아직 일을 하고 있어서 사회에 신세질 형편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인대접을 받는 게 싫다.
내 나이를 알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 노장이니 원로니 하는 소리도 듣기 싫다.
내가 생일을 챙기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리고 생일 아침이면 꼭 나이를 짚어 보는 게 싫어서다.
난 교수 정년 퇴임식도 거절했다.
'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후배 교수들 앞에서 쫓겨나는 꼴을 보이기 싫었다.
소송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정년제 소송은 안하는지 모르겠다.
헌법에는 어떤 차별도 못하게 되어있는데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나이 차별은 용납하는지.
난 경로석에 앉기도 민망할 때가 있다.
아직 건강한데, 그리고 행여 젊은 승객이 오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다.
이런 걱정을 해야 하는 내가 참 좋다.
급히 원고를 써야 하는 등 긴박한 사유가 아니면 난 아예 경로석 근처에도 안간다.
요즈음 장수사회가 되면서 노인 차별이 부쩍 심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로사상이라는 거창한 명분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주 한물간 사람 취급이다.
집에서도 푸대접이고 사회에서도 기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죽하면 노인 무용론을 들고 나온 정객이 있을까. 이러다 고려장이 법으로 제정되는 건 아닌지 솔직히 두렵다.
노인에 대한 사회인식이 이렇게 되고 보니 노인티를 안 내려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요즈음은 환갑잔치를 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난 노인이요!'하고 돈 써가며 선언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다.
그 뿐인가, 머리염색, 주름살 제거, 남자노인 화장품도 꽤나 잘 팔린다.
옷은 또 얼마나 멋쟁이로 입는데!
이게 모두 노인취급을 받기 싫어하는 일이다.
이제 노인은 훈장도, 명예도 아니다.
설움덩이다.
해서 나이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게 노인의 솔직한 심경인데도 우리 사회는 노인의 그런 절박한 사정에 전혀 무신경하다.
일상생활에서도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다.
으레 그렇게 묻는 게 습관이 되었다.
질문을 받은 이상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노인네 입장이 난처하다.
하지만 내 경우 58년 개띠라고 능청을 떤다.
다행히(?) 머리염색도, 주름살 제거도 할 정도는 아니어서 이런 능청에도 그냥 웃고 넘어간다.
정말 곤란한 건 신문.잡지사 기자나 방송국 인터뷰다.
거기서도 꼭 나이를 묻는다.
이건 아주 만천하에 나이를 공고하겠다는 소리다.
내가 어물쩡 넘겼는 데도 어디서 찾아냈는지 끝내 나이를 병기한다.
기사의 내용상 꼭 나이를 밝혀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 데도 말이다.
이게 사생활 침해라는 건 알기나 하는지 묻고 싶다.
서구 사회에서라면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
특히 여자나이를 묻다간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이젠 우리 사회도 지역감정을 고려해서 공적으로는 고향을 묻지 못하게 되어있다.
나이도 마찬가지다.
나이든 사람의 나이는 묻지 않는 게 예의다.
그의 프라이버시 존중을 위해서도 제발 '나이를 묻지 말아 주세요'.
자신의 나이를 당당히 밝히는, 그걸 자랑으로, 명예로 여기는 노인도 우리 주위엔 물론 적지 않다.
난 그런 노인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슬기와 깊은 지혜 그리고 삶에의 통찰, 이것이 노년의 관록이다.
이것이 존중받는 사회가 건강하고 건전하다.
그런데도 왜 나이듦을 밝히는 게 부끄러운 사회가 되었을까? 100세 시대가 바로 눈 앞인데,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물어야겠다.
누가 노인이냐고.
이시형(삼성 사회정신건강 연구소장)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포항 찾은 한동훈 "박정희 때처럼 과학개발 100개년 계획 세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