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중없는 1인 개혁 실패로...

공민왕 개혁 왜 실패했나

고려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했다.

이유는 많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에 따른 공민왕의 실의, 신돈의 부패, 권문세족의 저항, 신진사대부의 미성숙 등. 그러나 우리는 '1인 개혁'의 한계에 주목한다.

-전문-

공민왕의 개혁은 한마디로 반원개혁(反元改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세기 가까이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온 원나라와의 관계를 전면 부정했다.

원나라에 기대 고려의 국권을 침해해 온 권문세족을 숙청했다.

충렬왕 이래 빼앗긴 군 지휘권을 회수했다.

옛 동북면 지역, 즉 쌍성총관부를 수복했다.

문화적으로는 몽골 풍속을 따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공민왕의 개혁을 일반인이나 관료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까.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는 유례 없이 굴욕적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굴욕을 받아들였다.

오랜 전쟁으로 공포와 좌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민간인들은 자주에 따르는 전쟁과 굶주림, 공포보다 굴욕적인 평화를 택했다.

권문세족은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배만 채웠다.

고려와 원나라의 강화 조건에는 고려의 무장 해제가 포함돼 있었다.

고려는 철저하게 무장해제 됐다.

삼별초의 반란을 진압한 고려의 총사령관이며, 일본 정벌에도 참가한 김방경이 자신의 집에 갑옷과 창칼 48개를 보관했다는 이유로 참혹하게 고문당하고 유배됐을 정도다.

원나라는 고려의 재무장을 두려워 했다.

고려의 끈질긴 저항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재무장하지 못한 데는 원나라 군대의 힘으로 무인정권을 몰아낸 고려왕이 왕권 유지를 위해 원나라의 지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도 있다.

강화 후에도 고려의 군비는 정비되지 못했다.

왕실을 호위하는 최소한의 군사력만 존재했다.

군사 상황은 언제나 원나라에 보고되고 통제 받았다.

장교급에 해당하는 군 지휘관들은 원나라 황제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해적수준에 불과한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원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원나라는 부모의 나라로서 고려의 안전에 직접 관여했다.

고려 사람들은 원나라와의 이런 관계를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공민왕의 반원개혁은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도발이었다.

게다가 원나라는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공민왕을 징벌하겠다고 협박했다.

고려의 정치권은 혼비백산했다.

백성들도 이 같은 상황을 초래한 공민왕의 개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공민왕을 암살해서라도 현재의 평화에 안주하고 싶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퇴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원나라에 기댄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국방을 이룩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관계에 불과했다.

많은 고려인들의 인식은 공민왕의 인식에 미치지 못했다.

변화와 전쟁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공민왕을 지지하지 않았다.

공민왕은 왕이라는 위치에서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이 개혁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고급 정보에서 출발했더라도 혼자만의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공민왕의 개혁은 대중과 공유되거나 적어도 납득됐어야 했다.

광범위한 개혁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을 때에만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역사는 '1인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여러 차례 증명한다.

공민왕 외에 조선 광해군, 조광조, 김옥균의 개혁이 그랬다.

개혁이 필요한 상황뿐만 아니라 대중의 인식이 뒷받침돼야 한다.

홀로 앞서가기보다 설명과 설득이 우선돼야 함을 보여준다.

역사 속의 성공한 개혁과 실패한 개혁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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