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도에서 길을 묻다-(4)길 위의 노래

소설가 박희섭의 기행

빠트나 행 기차는 여덟 시간 뒤인 밤 열 두시 경에나 도착할 예정이다.

나는 시끄러운 역사 안에서 오후의 햇살이 따갑게 쏟아지는 바깥을 내다보며 망설인다.

기차가 올 동안 무얼하며 보내야 좋을지 마땅한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일단 거리로 나서기로 한다.

아무래도 역사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 역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시간을 보낼 레스토랑이나 다방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소와 개, 장사치들로 붐비는 냄새나고 비좁은 거리를 할 일없이 어슬렁거린다.

길에 선 채 짜이를 사 마시기도 하고, 철판에 납작한 도사(Dosa)며 난(Naan: 인도식 빵)을 굽고 있는 허름한 노변 식당 앞을 기웃거리거나 장미며 금잔화를 꿰어 신에게 바칠 화환을 만드는 손길을 구경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어쩌면 인도에서 여행이란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기다림으로 끝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짜증과 조바심일 뿐인 그 기다림은 인도에 온 지 열흘쯤 지나면서 조금씩 새로 사 신은 신발처럼 익숙해진다.

여행에서 바쁠 건 하나도 없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목표 지향적으로만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유한한 삶을 무한경쟁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생사를 결하는 전장도 아니고 빼앗고 뺏기는 도박판도 아니다.

삶을 투쟁으로 몰아붙이는 건 비정한 자본주의식 논리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 역시 산업사회에서 노동력 착취를 위해 만들어낸 유물론적 사고방식일 뿐이다.

삶이나 여행의 의미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 있으며, 인생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아까워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런 면에서 인도를 여행하는 일은 기다림의 미덕을 깨우치는 일이기도 하다.

여덟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열차에 올랐지만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수십 칸이 넘는 기차는 통로까지 만원이다.

이럴 때는 덩치가 큰 게 다행스럽다.

한참이나 용을 쓴 끝에 겨우 자리잡은 게 연결통로와 이어진 화장실 옆이다.

나는 다른 인도인들 사이에 슬리핑백을 꺼내 바닥에 깔고 배낭을 쿠션 삼아 옹색하게 웅크리고 앉는다.

기차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밤을 가로지른다.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승객들과 뜨내기 장사꾼들, 문틈 사이로 새어드는 냉랭한 고원의 밤바람, 고약스런 지린내도 잠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짙은 피로가 의식을 어둠 속으로 몰아간다.

유난히 다이내믹한 인도 기차의 금속성 굉음이 밤새 고막을 두드린다.

기차 바닥의 냉기가 이방인의 뼛속에 외로움처럼 파고든다.

목적한 빠트나 역에 내렸을 때는 예정보다 2시간 넘게 연착한 오후 무렵이다.

때아닌 겨울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역전은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다.

게다가 간만에 내린 비에 소똥과 흙, 쓰레기가 뒤엉겨 길은 진창이 되어 있다.

가이드북에서와 달리 빠트나 시외버스 정류장은 도심에서 십여 킬로 떨어진 변두리로 옮겨져 있다.

녹색 베레에 소총을 맨 경찰이 비하르 샤리프로 가는 마지막 버스라며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비좁은 버스에 오르자 눅눅한 습기와 함께 비에 젖은 몸이 마르면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한다.

옆자리의 젊은 인도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관심 있게 묻는다.

뒤이어 인도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여긴 초행길이냐 등등으로 이어질 터이다.

그건 인도인이 동양인에게 가지는 순진한 관심의 표현이다.

비하르 샤리프에서 합승 지프로 갈아 타고 석가모니 시절 마가와 왕국의 수도이자 죽림정사(竹林精舍)와 영취산이 있다는 라지기르에 내렸을 때 난 약간 당혹감을 느낀다.

가뜩이나 한적한 마을 전체가 비로 인한 정전으로 암흑에 빠져 있다.

희미한 촛불을 내건 상점들이 점점이 어둠을 밝힐 따름이다.

릭샤를 잡아타고 호텔로 가자고 했을 때 늙은 릭샤왈라는 한참을 달려 겨우 윤곽만 흐릿한 어떤 3층 건물 앞에 나를 내려놓는다.

현관에서 몇 번을 외쳐서야 손에 라이터불을 켜들고 나타난 호텔 주인은 예상 밖의 비싼 가격을 부른다.

지리에 어두운 데다가 정전까지 된 마당에 다른 숙소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남자는 나에게 기다리고 한다.

한참 만에 요란하게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현관이며 복도에 환하게 전깃불이 들어온다.

나 혼자를 위해 호텔 전체에 불을 밝힌다는 사실에 숙박비가 그리 아깝지 않다.

아침 일찍 간단히 샤워만 마치고 고탐 비하르 호텔을 빠져나온다.

부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파했다는 그리다꾸다(영취산: 靈鷲山)에 오르기 위해서다.

가는 길에 폐허처럼 버려진 죽림정사와 그 옆의 번듯한 일본인 사원을 둘러보고 인도에선 보기 드문 온천도 구경한다.

이른 시간대여서인지 그리다꾸타로 가는 길은 텅 비어 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부지런한 소년 하나가 말이 끄는 수레인 통가를 몰고 와서 나에게 탈 것을 권한다.

높다란 통가에 앉아 흔들리며 나는 길에 대한 상념에 빠져든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길에 있는지 모른다.

부처 생전 인도에서 환생을 의미하는 삼사라(Samsara)는 '끝없는 유랑'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돌아보면 길은 유랑이고, 삶 또한 유랑이다.

지워지고 다시 생겨나는 길처럼 인생 또한 그러하다.

사람들은 길에서 인간을 만나고 길에서 삶의 진실과 마주친다.

길에서 도를 닦고 길에서 생사를 나눈다.

길은 시간이며 역사고 삶이며 소통이다.

운명이자 기다림이며 이별이자 만남이다.

지금 내가 통가에 실려 가고 있는 이 길은 싯다르타가 오고, 도를 깨친 붓다가 지나간 길이다.

삼장법사가 지나간 길이자 혜초가 지나간 길에 지금은 내가 지나간다.

그래서 삶은 윤회하며 길은 유구하다.

정상에 부처의 설법단이 있는 영취산은 아침 안개에 싸인 채 텅 비어 있다.

티베트에서 본 룽다(경문이 적힌 천 다발을 만국기처럼 매단 것)가 산 정상에 형형색색으로 걸려 있다.

나는 설법단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강론했을 부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한참 둘러보는 사이에 뒤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돌아보자 몇 마리의 원숭이가 허공에 매어놓은 경문이 적힌 천을 찢어먹고 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아님 나은 내생을 위해 경문을 먹는지 나로선 알 도리가 없다.사진: 죽림정사와 영취산이 있는 라지기르의 거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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