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4 매일보훈대상 10인의 수상자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매일신문이 주최하고, 대구지방보훈청이 주관하고, 국가보훈처, 대구상공회의소가 후원하는 '2004 매일보훈대상 시상식'이 23일 오후 3시 대구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매일신문은 올해 상이군경, 유족, 미망인, 장한 아내, 특별보훈 등 5개 부문에 걸쳐 2명씩 총 10명의 수상자를 선정했다.

이들 수상자는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실천해 전후세대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권성훈기자 cdrom@imaeil.com

〈대구〉

17년 동안 공무원 재직

▨ 상이군경 부문 하만태(河萬泰.78.북구 산격4동)씨

1926년 6월 25일 경북 경주군 감포읍 필조리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하씨는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생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1951년 2월 육군에 입대, 여러 전투에서 열심히 싸웠다.

1952년 11월에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왼쪽 팔꿈치와 팔목 사이에 박격포탄 파편을 맞아 왼쪽 팔꿈치 아래가 절단돼 1953년 4월 명예제대했다.

이후 그는 감포읍사무소 서기, 팔조동 동장 등 17년간 공무원으로 일했다.

1969년 8월에는 주민등록업무 정비로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소년소녀가장돕기 앞장

▨ 유족 부문 정재종(鄭在宗.55.달서구 이곡동)씨

정씨의 아버지 고(故) 정남묵씨는 1952년 2월 강원도지구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어머니 김우득씨는 1953년 여군 간호장교로 입대해 부상당한 전우들을 남편처럼 생각하고 열과 성을 다해 치료했다.

1948년 9월22일 경북 상주군 청리면 율리의 한 농가에서 두 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1967년 대구 성광고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악기제조회사에서 일했다.

결혼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식당을 운영해 나름대로 성공했다.

그는 동서서한아파트 초대 입주자대표를 맡으면서 소년소녀가장 돕기에도 앞장서 구청장 표창을 받았다.

날품팔이 해 유복자 키워

▨ 미망인 부문 이영수(李永秀.73.서구 평리5동)씨

이씨는 1946년 18세때 남편 이종천씨를 만났지만 6.25전쟁의 발발로 남편이 경북 문경군 화북전투에서 전사함에 따라 짧았던 신혼생활을 뒤로한 채 미망인이 되었다.

1930년 7월 칠곡면 국우동에서 2남3녀 중 맏딸로 태어난 그는 5남매를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항상 도왔기 때문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효녀'라는 칭찬을 듣고 자랐다.

그는 또 아버지 없는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을 키우기 위해 날품팔이와 삯바느질 등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씨의 아들 양우씨는 현재 서구 평리1동 동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체장애 아동들 돌봐

▨ 장한 아내 부문 고숙인(高淑人.53.수성구 신매동)씨

전쟁상이군경 1급 김덕수씨의 아내 고숙인씨는 월남전에 파병돼 두다리를 잃은 남편 김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있다.

고씨는 경남 진해 해군병원 부상자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편을 위문차 방문했다가 처음 만났다.

그는 부모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 부상을 입은 김씨와 결혼, 현재 1남2녀의 자녀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는 또 20여년간 욱수성당 단장으로 지체장애 아동들을 돌보고 있으며, 지금도 사랑의 집과 평화마을 등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0년간 이장 각종 운동 동참

▨ 특별보훈 부문 유이도(兪二道.74.달서구 상인동)씨

1929년 2월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에서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유씨는 1950년 9월15일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용문산, 현리, 양수리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중공군이 남하하는 것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제대한 이후 고향인 가태2리에서 10여년간 이장직을 맡으며 퇴비증산운동을 비롯, 문맹퇴치운동, 산아제한운동, 주택개량사업, 새마을운동 등에 적극 동참했다.

1966년 이장직을 그만두고 대구로 와서 신우건설을 창립했다.

〈경북〉

마을 노인회관 수시 방문

▨ 상이군경 부문 김길정(金吉貞.76.경북 안동시 용상동)씨

1952년 6월 25일 육군에 입대한 김씨는 제2사단 17연대로 배속받아 1953년 3월 30일 철원지구 백마지구 전투에서 우측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뼈가 완전히 부서지는 중상을 입고 1953년 10월 30일 명예제대했다.

그는 제대 이후 불구의 몸으로 춘양초교 기능직으로 일하다 1961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동장을 맡아 봉사했다.

그 공로로 그는 봉화군수 및 안동보훈지청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현재도 마을 노인회관을 수시로 방문, 간식과 음료수 등을 제공하며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

불우회원들 돕기 활동

▨ 유족 부문 박태수(朴泰洙.70.경북 영주시 하망동)씨

박씨는 1985년 9월 20일 '502 반공포병 대대'에서 근무하던 장남 세영씨를 잃은 지 3년뒤인 1988년부터 대한민국 전몰군경 유족회 대의원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그는 보훈회관에 상주하며 불우회원들을 돕고 있으며 바둑, 장기 등으로 회원들의 친목도모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또 매월 1일 충혼탑을 참배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청소하고 있다.

1985년에는 영주2동 정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오물 안버리기 운동, 국토대청결 운동, 소백산 유원지 등의 행락철 환경정리 등으로 영주시장 표창을 받았다.

미망인 회원 단합.복리 증진

▨ 미망인 부문 권연(權蓮.75.경북 청송군 청송읍)씨

권씨의 남편 고 박영근씨는 6.25전쟁 당시인 1952년 8월 5일 전사했다.

당시 권씨의 나이 25세. 그는 혼자힘으로 어려워진 생계를 꾸리며 날품팔이를 하는 등 고생 끝에 세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1977년에는 청송군 미망인 지회장을 맡으면서 회원들의 단합과 복리증진에 앞장섰으며, 1994년과 2000년에는 미망인회 경북지부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자원재활용, 자원보호활동 등에도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경북도지사 표창을 수상했다.

정부 상금 이웃 위해 쾌척

▨ 장한 아내 부문 정봉순(鄭鳳順.54.경북 경주시 안강면)씨

정봉순씨의 남편은 1972년 월남전에 참전했다 부비트렙이 폭발, 얼굴과 두개골 앞 부분에 큰 부상을 입고, 양쪽 눈이 모두 실명된 1급 상이군경 전상도씨. 같은해 11월24일 전씨와 결혼한 이후 정씨는 뇌경색까지 걸려 거동조차 불편한 남편을 30여년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왔고, 생계를 위해 밤에는 야간 간병일까지 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10여년간 새마을지도자 청년회장을 맡았는가 하면, 정부로부터 받은 100만원의 상금도 마을회관을 짓는데 내놓아 안강면 옥산동 이웃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병원 등 유치 고장발전 기여

▨ 특별보훈 부문 김한욱(金漢郁.70.경북 상주시 화서면)씨

1933년 소백산 인근의 외딴 마을에서 태어난 김씨는 6.25전쟁 중인 1953년 6월 용약군에 입대, 1954년 2월27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그는 월남전에 제15후송중대장으로 참전, 일선 야전의무활동을 하였다.

1981년 3월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그는 이후 1994년까지 대한병원협회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2000년 1월부터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상주시 지회장에 취임, 단체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는 또 대중목욕탕, 병원, 공용주차장 등을 유치하는 등 고장 발전에 크게 기여해 주민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고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