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영화팬의 영원한 우상이자 20세기 최고의 배우 반열에 올랐던 말론 브란도가 1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미국 네브라스카주(州) 오마하에서 1924년 출생한 브란도는 1950년 자신의 첫 영화 '더 멘(The Men)'을 통해 은막에 데뷔했다.
블란도는 어떤 영화에 출연하더라도 영화팬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을 강력한 캐릭터를 연기했고, 그의 명성은 그동안의 손꼽기 힘들 각종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만 8차례 올랐고, '워터 프론트(1954)'와 '대부(代父.1972)'로 두 차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울러 '혁명아 자파타(1952)'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등을 한때 휩쓸기도 했다.
특히 '대부' 1편에서 맡았던 마피아 대부 돈 꼴레오네 역이나 전쟁의 폭염과 피끓는 광기를 보여준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의 미군 커츠 대령역의 장면 장면은 모든 영화팬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돼 있다.
이밖에 그가 출연한 대표적 영화만도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1951)', '아가씨와 건달들(1955)', '애꾸눈 잭(1961)',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등이 있다.
그는 80-90년대에도 '포뮬라(1980)', '백색의 계절(1989)', 콜럼버스(1992)', '닥터 모로의 DNA(1996)', '더 브레이브(1997)' 등에 계속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말년이었던 지난 2001년에는 로버트 드니로와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스코어'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3년만에 '브란도 앤드 브란도'란 제목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 위해 숨지기 전까지 준비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계에서는 전설로 통했던 브란도이지만 그의 개인 삶은 불행했다는 평이 나올 만큼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말년에는 가족사의 불행과 파산지경까지 이른 재정난 등이 그를 괴롭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들인 크리스천이 지난 90년 이복 여동생 샤이앤의 약혼자를 살인한 혐의로 기소돼 크게 상심했던 브란도는 이후 샤이앤이 충격으로 자살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항상 대중의 시선 속에 살아야 했던 주변 환경도 그를 압박한 요인이었고, 급기야 그는 LA의 자택에서 사실상 칩거생활에 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브란도는 "내가 유명하고 부유했기 때문에 내 생애에서 너무도 많은 불행을 겪었다"고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이와 함께 브란도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해 이혼한 아내가 3명이나 된다. 또 가정부, 비서를 비롯한 여러 여성들과의의 스캔들로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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