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뉴스쿨 드라마 워크숍의 연기 지도를 맡았던 스텔라 애들러 교수가 학생들에게 닭장 위에 폭탄이 막 터지려는 순간의 암탉 연기를 해보라고 시켰다.
대부분 닭 소리를 크게 내고 날갯짓을 하며 방안을 미친 듯이 뛰었으나 한 학생만 구석자리에 차분히 앉아 알을 품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바로 저거야'라고 애들러 교수가 소리쳤다.
그가 바로 1943년 연기지도를 받던 19세의 말론 브랜도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명배우 중 한 사람으로 꼽혀온 브랜도는 어느 한 시기나 특정 장르와는 관계없이 장르와 시기를 넘나들며 영화사의 수많은 걸작에 출연한 배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이면서도 할리우드를 경멸하고 증오했으며,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인권운동, 반전운동 등에 활발히 참여한 운동가였다.
"영화 연기라는 건 그저 따분하고, 지루하고, 유치한 일일 뿐이다.
나는 연기에 존경심 같은 건 없다.
연기란 대체로 신경성 충동의 한 표현이며, 배우란 직업은 완전한 자기 방종에 빠지는 건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배우라는 사실에 끊임없이 회의하면서 평생 배우 생활을 했던 브랜도가 2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에게 연기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천성의 배우였음에는 틀림없다.
올 여름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던 영화 '브랜도 앤 브랜도'의 주연을 맡아 병마를 딛고 영화계에 복귀하려고 했던 그가 안타깝게도 스크린과 영영 멀어져 버리게 됐다.
▲1924년 네브래스카주 오하마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의 뉴스쿨 드라마 워크숍에서 연기이론을 배우고, 액터스 스튜디오를 나온 뒤 19세에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 섰으며, 1950년 영화 '더 멘'으로 데뷔, 52년엔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54년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아카데미상 최우수 연기상 후보에 올랐고, '워터프론트'에 이어 '대부 1'로도 이 상의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뽑혔으나 아메리칸 인디언 홀대에 항의하며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타고난 반항아 기질 때문에 미국 영화계에서는 이단아로 여겨지기도 했던 그는 배우로서는 화려한 각광을 받았으나 사생활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세 번 결혼해 9명의 자녀를 뒀지만 한 아들이 딸의 남자친구를 살해했으며, 그 딸이 자살했다.
그 이후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은둔, 촬영 때만 할리우드에 나타나 단역에 출연하면서 아들의 재판 비용과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튼 '천상 배우'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떠났지만 그 빼어난 연기는 오래 빛날 것이다.
명복을 빈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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