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천도'-(上)수도를 왜 옮겼나?

새 행정수도 입지로 충남 연기'공주가 사실상 확정된 가운데 수도 이전 논란이 가속화하고 있다.

천도(遷都) 논란에서부터 수도 이전에 따른 비용문제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의견이 표출되고 있다.

그 중에는 우리 역사에서 줄곧 있어온 천도의 역사와 이유를 되돌아봄으로써 '현실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천도의 이모저모를 되돌아봤다.

동양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수도를 옮긴 사람은 중국 주나라 무왕으로 전해진다.

은나라를 정벌한 그는 은의 수도 대신 주나라의 도시를 수도로 삼았다.

무왕은 백성이 자기를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옮긴 수도로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고, 결국 백성은 주나라를 향해 보따리를 쌌다.

그후 왕조가 바뀔 때면 수도를 옮겨 백성들의 신임을 묻는 것이 관례가 되다시피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왕조가 바뀔 때면 수도를 옮겼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이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즉위 후 2년만인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귀족 및 수구 세력들을 제거하고, 친위세력을 새로 형성하기 위한 것이 천도의 주요 배경이었다.

태조를 이은 정종이 정정불안을 이유로 개경으로 환도한 것을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한 인물이 태종 이방원이었다.

소설가 이재운씨는 "한양 재천도를 힘으로 밀어붙인 태종은 왕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종조로 이어지는 화려한 문치를 이뤄낼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천도는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조선의 한양 천도는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단행한 것 역시 만주 국내성에 뿌리내린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 대신 개경을 수도로 정했다.

풍수지리설에 정통한 도선국사가 개경을 수도로 정해줬다는 얘기도 있지만 신라의 귀족세력이 굳게 뿌리를 내렸던 경주를 수도로 삼는다면 고려왕실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됐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던 신라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론, 고려 공민왕 때의 충주 천도론, 조선 광해군의 교하 천도론, 정조의 화성 천도론 등도 그 밑바탕에는 귀족이나 신하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깔려 있었다.

빈번하게 수도를 옮겼던 백제는 왕권강화에다 국가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목적이 맞물려 있는 경우였다.

고구려의 힘에 눌린 백제는 한성(서울)에서 공주의 웅진성으로, 이어 다시 사비성으로 천도를 했다.

김수태 충남대 교수는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을 벗어나야 하자 백제 왕실은 가장 대표적인 귀족 가문이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이기도 했던 목씨 세력의 영향력에 있던 웅진 지역을 바탕으로 왕권을 새롭게 확립하려 했다"고 추론했다.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무신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몽골군이 물을 싫어하고 배 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부 세력은 바다를 사이에 둔 강화도로 피신할 생각을 한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건국한 발해도 건국 초기 네차례나 천도를 했다.

그만큼 정정이 불안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영호 상주대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천도는 궁극적으로 지배세력 교체를 통한 왕권강화가 주된 목적이었다"며 "수도 이전은 국가의 명운을 결정한 중요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그로 인한 국가적, 국민적 이해득실을 다각도로 따져봐야 한다는 교훈을 역사 속의 천도 사례들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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