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천도-(하)그 성공과 실패

행정수도 이전을 두고 최근 여'야가 '역사논쟁'까지 벌여 주목을 끌었다.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가 "국민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한 천도를 강행하다 쫓겨났던 궁예의 전례를 생각하라"고 말하자 열린우리당 김현미 대변인이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조선왕조가 600년 동안 부흥했다는 사실을 모르나"라고 맞받은 것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천도(遷都)는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 국가적 대사였다.

수도를 잘 옮겨 국운이 융성한 경우도 있는 반면 천도에 실패해 국운이 쇠락하는 빌미가 된 사례도 없지 않았다.

경주를 수도로 삼아 '천년왕국'을 건설한 신라. 그 신라도 신문왕 때 경주를 버리고 달구벌(대구)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왕실에 비판적인 전통 진골 귀족세력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689년 달구벌 천도를 선언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새로운 수도 입지로 토착세력이 미약한 달구벌이 선정됐고, 이 곳을 무대로 신문왕은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신라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는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경주에 굳게 뿌리를 내린 진골 등의 수구 세력이 신문왕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달구벌 천도 실패로 통일신라는 멸망할 때까지 수많은 내분에 휩싸여 대륙 진출은커녕 내부 안정조차 이루지 못했다.

통일 직후 과감히 천도를 하고 왕조의 면모를 일신했다면 신라의 역사는 달라졌을 테지만, 그 뒤의 신라는 사실상 경주 일대나 지배하는 토호세력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신라의 천도 문제'란 논문을 발표한 이영호 상주대 교수는 "천도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신라는 새 수도 달구벌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등 비약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평양) 천도론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격렬한 수도 이전 논란으로 꼽힌다.

왕의 묵인으로 묘청 등은 평양 천도를 추진했고, 이들 천도파는 고려 국왕은 황제이며 독자적인 연호를 써야 하고, 금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개경을 장악한 문신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천도를 막았고, 천도파는 평양에 궁성을 짓고 천도를 계속 추진하다 결국 김부식 등의 개경파에 진압당하고 말았다.

신라, 고려가 달구벌, 서경 천도를 실행에 옮기지 못해 국운이 쇠락한 경우라면 고구려는 잇따른 수도의 남진(南進)으로 북방 대륙 국가에서 반도 농경 국가로 국가의 위상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현재 중국의 랴오닝(遼寧)성에 속하는 졸본성에 수도를 정했던 고구려는 그후 압록강 주변의 국내성, 그리고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소설가 이재운씨는 "역사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지만,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시절 중국의 선양(瀋陽) 근처로 천도를 했더라면 삼국시대 이후 수많은 왕조가 부침하던 중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와 달리 개국 직후 한양을 수도로 정한 조선이나 개경을 수도로 삼은 고려는 천도를 통한 왕권강화에 성공, 국가적인 융성을 이뤄내는 토대로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문기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은 "우리 역사 속에서 천도는 새로운 정치'사회 질서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거나 당면한 국내'외적 위기탈출 방법의 하나로 시도되거나 실현됐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전체적인 면에서는 천도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 경우가 많았다"며 "천도는 한 국가의 복심(腹心'핵심)의 이동인 만큼 국가의 성쇠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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