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7월 10일 11시. 6.25전쟁 발발 1년여만에 '제 1차 휴전회담'이 개성의 내봉장(來鳳莊)에서 열렸다.
전쟁은 중국의 참전 이후 양측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이미 교착상태에 빠진 상태였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전투 속에서 전쟁 확대에 대한 우려 때문에 개시된 휴전회담이었지만, 양측의 입장차로 두 차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년여를 끌었다.
당시 회담의 수석대표는 UN군측은 미국이, 공산군에선 북한이 맡았다.
우리나라는 단순한 참관인 자격이었고 발언권은 없었다.
전시작전권이 이미 UN군에게 넘겨진 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무장지대 설정을 위한 군사경계선 문제'와 '전쟁포로 처리 문제' 등의 쟁점으로 인해 회담은 난항을 거듭했다.
그런 와중에 8월 4일 중국군의 무장부대가 회담장 중립지대를 침범한 사건이 발생했고 8월 19일에는 결국 회담이 중단됐다.
회담이 중단된 이후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고 양측의 피해도 늘어만 갔다.
이승만 정권은 '휴전 결사반대'를 주장했지만, 휴전회담이 시작된지 25개월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됐다.
휴전 이후 계속되던 남북간 무장대립은 근래 크게 해소됐다.
종전(終戰)은 과연 언제쯤?△1900년 파리 지하철 개통 △ 1951년 제 1차 한국전 휴전회담 △1962년 미국, 세계 최초 통신위성 '텔스타(Telstar) 1호' 발사 △1974년 남북적십자 1차회담, 판문점서 열림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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