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호)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

요즈음처럼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럽다 보면 우리가 그간 이룩한 역사적 발전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회의가 든다.

바로 2년 전 2002 월드컵 때만 해도 우리는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라는 어려운 양대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냄으로써 드디어 후진국, 약소국의 서러움을 뒤로 하고 세계 선진국의 대열에 오른 듯한 자축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민족의 염원인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 또한 그리 머지않은 일인 듯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권력 추구 자체가 정치의 최고 목표이고 무책임한 대중적 인기 영합이 곧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듯한 정치권은 이념으로 포장된 무지와 무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형국이다.

개혁을 높이 외치면서도 결식아동이나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해결책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니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 김선일씨의 잔학한 살해 사건은 자주외교, 자주국방을 외쳐대는 우리 국력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이었다.

지금 우리는 자탄에 빠질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자탄에 빠지는 일이다.

우리가 크게 발전했음을 확인하고 역사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는 구체적 증거들을 찾아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올 봄에 드디어 완성된 이정 박헌영 일대기와 전집이다.

널리 국민의 추앙을 받던 반일 투쟁가이면서 공산당 거두로서 대한민국에서는 이름조차 거론하는 것을 쉬쉬해야 했고 북한에서는 부수상, 외무상으로 일하다 1956년 돌연 "종파분자, 미제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한 그의 전집이 이 땅에서 출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10년 전만해도 몇이나 되었을까. 그동안 우리가 이룩한 민주화와 경제발전이 아니고는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박헌영 일대기의 발간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첫째 그러한 책을 발간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여유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일이 갖는 더 큰 의미는 이 책들이 철저한 학술적 탐구와 검증에 기초한 사료들이고 어설프고 편파적인 해석의 시도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전집〉은 제1-3권 박헌영 저작집, 제 4-7권 관련 자료집, 제 8권 관련증언과 회고록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 9권에 해당되는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박헌영의 삶을 엄격한 사료 검증을 통해 일지 형식으로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의 집필과 편집진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우리나라와 일본, 미국의 문서고들을 샅샅이 뒤져야 했고 특히 러시아에서 새로운 사료들이 개방됨에 따라 일단 마무리되었던 작업을 전면 재개해야 했다.

3년으로 생각했던 작업이 10년이 넘게 걸렸지만 아직도 북한과 중국 측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우리의 정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작업을 지원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닦아온 학문적 성숙이 아니었더라면 극히 탁월한 인물됨은 인물됨대로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실패와 비극은 그것대로 드러내주는 고도의 학술적 가치를 지니는 이런 방대한 규모의 자료집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헌영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조명에 끝나지 않고 이 귀중한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독자들의 몫이고 사실 책이 살고 죽고도 거기에 달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 그것을 보지 않고는 일제시대에서 6.25 전쟁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제시대 우국적 지식인들에게는 공산주의만큼 매력적인 이념적 지주가 없었고 박헌영은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품과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지적으로 수월했던 그조차도 경험의 포로가 되는 한계 때문에 스탈린주의의 정체를 미리 꿰뚫어 볼 수가 없었거나 보았어도 거부할 엄두를 내지 못했음을 이 자료들은 보여준다.

공산주의자에 앞서 철저한 애국자요 민주주의자였던 그도 본래대로 소신을 펴지 못한채 스탈린의 한반도 적화통일 정책의 도구로 이용당하다가 스탈린 사망 후 김일성에게 목숨과 명예 모두를 빼앗김으로써 결국은 스탈린이 지휘한 피의 대숙청의 희생물이 된 러시아 혁명 1세대의 전철을 밟고 만 것이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되풀이 하게 된다는 무서운 말이 있다.

높은 학문적 가치를 지니는 박헌영 전집의 발간이 우리가 그 저주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열쇠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이인호(명지대 석좌교수.전 주러시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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