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부름꾼으로 시작 최고 명장에 오른 이용구(69)씨

오부자 공방장 이용구(69'무형문화재 징장)씨가 징'꽹과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60년전인 아홉살 때부터다. 이들과는 질기디 질긴 인연을 맺은 셈이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 서원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이 마을이 '안의징'으로 전국에서 명성을 떨치던 곳인 만큼 운명처럼 징과 마주치게 됐다.

가정이 어려워 소학교를 중퇴한 그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먹고살기가 막막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징 제작기술 보유자였던 오덕수(89년 작고)씨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며 징 만드는 일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우∼웅 하는 징소리가 울림병처럼 온 몸을 휘감고돌아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는 그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징만 잡으면 신이 났다"고 말한다.

17세 때 본격적인 풀무질꾼을 시작으로 센메꾼, 앞메꾼을 거쳐 26세에 징 작업의 최고 기술자인 대정이가 되었다.

그러나 70년대 새마을운동은 도시화'산업화로 치달았으나 대신 우리 전통과 놀이문화는 소비'향락적인 것으로 몰아붙여 징 사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우선 먹고 살기가 힘들어 고민 끝에 징을 팽개쳤다.

서울로 올라가 막노동을 하며 겨우겨우 연명하던 세월이 10여년, 그러나 징소리는 여전히 귓전을 맴돌았다고 한다. 많은 고민 끝에 지난 86년 거창읍 학리 가막산 자락으로 내려왔다. 이때부터 두번 다시는 징을 놓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이런 결심이 열매를 맺어 지난 88년 이후 전승공예대전에서 3회 연속 수상을 한 후 93년에는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 '징장'으로 지정됐다.

91년에는 이어령 당시 문화부장관의 특별 지시로 '한국표준 징소리찾기사업'이 추진되면서 이용구 징장이 만든 '방짜징'이 우리나라 최우수 징으로 선정돼 국립국악원에 소장되기도 했다.

거창'정광효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