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 서울에서 잇따라 발생한 부유층
노인 연쇄 살인사건이 경찰 추정대로 동일범의 소행이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국민
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33)씨는 노인 살해사건 4건 외에도 추가로 12차례나 살인을
자행, 부유층 노인과 출장 마사지 여성, 노점상 등 무고한 시민 20명을 살해해 역대
단일범으로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되게 됐다.
경찰은 인천 노점상 살인사건이 유씨 소행으로 확인돼 피해자가 애초 19명에서
20명으로 늘어났다며 '26명을 죽였다'는 유씨 진술에 따라 경찰수사가 더욱 확대될
예정이어서 범행이 속속 확인될 경우 국민들이 받을 충격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특히 이번 범행은 동기가 종래 살인사건처럼 금품을 노리거나 개인적 원한 등이
아니라 일방적인 이혼과 재혼 실패 등에 따른 여성과 부유층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
이었고 이로 인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무차별적으로 자행됐다는 점에서 더 큰 충
격을 주고 있다.
◆ "부자.여자가 미웠다" = 유씨는 아버지가 노동일을 하던 가난한 가정의 3남1
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씨가 중학교 1학년이던 해 아버지마저 지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어머니 밑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고 서울의 K공고 재학시절 절도로 소년원에 가면서 유
씨는 범죄 인생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학교를 중퇴한 뒤로도 13차례에 걸쳐 특수절도, 성폭력 등 각종 범행으로 7년간
복역했으나 92년 전처 황모(34)씨를 만나 가정을 꾸린 뒤 아들도 낳았다.
2000년 3월 특수절도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는데 복역 중이던 2002년 5월 아내
의 이혼 소송으로 이혼을 당했고 아들의 양육권마저 빼앗겼다.
경찰은 이런 인생 이력 속에서 유씨가 자신의 순탄치 못한 인생이 부유층 탓이
라는 왜곡된 사고를 갖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자신의 행복을 부자들이 앗아갔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께 전화방에서 일하던 김모(여)씨에게 호감을 느껴 청혼했지만 전과
자에 이혼남, 게다가 지병인 간질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거절당했다. 유씨의 여
성에 대한 증오심은 그렇게 커졌다.
안마사 출신 전처 역시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자녀 때문에 포기했다. 대신
전처와 자신과의 결혼 약속을 파기한 김씨와 유사한 직업을 가진 보도방과 출장 마
사지 여성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 계획된 범죄, 치밀한 범행 = 부유층 노인 상대 살인의 경우 사전에 범행 대
상을 선정해 저지른 계획 범죄였다.
유씨는 범행 현장을 사전답사해 대상을 정한 뒤 범행에 들어갔다. 목격자를 피
하기 위해 길가에서 멀리 떨어지거나 정원이 넓어 외부에서 집안 상황을 알 수 없는
부유층 저택을 노렸다.
범행 시각으로는 가족들이 모두 외출하고 노인 혼자 집을 지키는 점심시간 전후
나 오후 시간대를 택했다. 일단 범행에 돌입하면 무자비하고 철저했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노인이든 젊은이든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그는 특히 자
루를 짧게 해 쥐기에 편하도록 무게 5㎏짜리 흉기를 직접 만들어 피해자들의 머리
등을 수 차례 내리치는 수법으로 현장에서 사망케 했다.
예외가 있다면 어린 아이였는데 유씨는 혜화동 사건 때 집에 있었던 당시 7개월
된 아이는 그대로 놔뒀다. 이에 대해 유씨는 "나도 아이가 있어서"라고 경찰에서 진
술했다. 이는 유씨가 전처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아이 때문에 포기했다는 부분과
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으로 부유층이나 여성에 대해선 무자비하면서도 아이에게만은
유독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범행 후 증거인멸 작업은 더욱 철저했다. "4개 사건을 수사한 결과 경악할 수준
이었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지문을 남기지 않은 것은 물론 체모나 정액 등 DNA 추
적을 당할 만한 단서는 일절 남기지 않으려 했다.
유씨는 경찰에서 "이 때문에 성폭행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곳에선
모두 발자국을 지우고 나왔는데 신사동 사건 때 승강이를 벌이느라 시간이 없어 발
자국을 못 지우고 나온 게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도 했다.
신사동 사건 때는 또 범행 현장에 흉기를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려 사건현장으로
되돌아가 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 현장을 떠날 때 잠그고 나왔던
방문을 발로 차 부순 점은 경찰 수사 내내 풀리지 않는 의혹이었다. 유씨는 또 "구
기동 사건 현장검증을 잘 해봤느냐"며 "그 때 발길질을 많이 해 아마 다리의 털이
떨어져 있을 텐데 잘 찾아보라"며 수사진을 조롱하기도 했다.
혜화동 사건 현장에 불을 질렀던 이유는 범행 과정에서 다쳐 흘린 핏자국을 없
애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유씨는 "핏자국을 지운다 해도 혹시라도 DNA 분
석에서 걸릴까봐 아예 불을 질러 이를 없앴다"고 진술했다.
범행 후 경찰 불심검문에 걸리면 일부러 간질 증세를 일으켜 검문을 벗어나곤
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유씨는 그러나 금품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위조 경찰 신분증과 시장
에서 산 수갑으로 경찰을 사칭, 성매매 여성이나 불법 음반.CD 제조업자 등을 협박
해 갈취한 돈으로 보증금 400만원에 월 35만원짜리 오피스텔의 월세는 물론 생활비
등을 해결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 여성 증오심에 엽기적 토막살인 = 속칭 보도방이나 출장 마사지 여성들은 서
울 마포구 노고산동의 오피스텔로 불러들여 살해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모든 시
신을 토막내기까지 했다.
특히 첫 희생자가 된 김모(25.여)씨는 손가락의 지문들을 도려내는 것은 물론
시신을 잘게 토막내 거주지 인근 모 대학 뒷산에 묻었고 나머지 10명 역시 같은 방
식으로 살해한 뒤 토막내 인근의 모 사찰 근처에 묻었다.
시신을 옮길 땐 토막낸 시신 부위들을 검은 비닐봉지 5~10겹으로 포장해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한 다음 택시를 이용해 8~9차례 은닉장소와 주거지를 오가며 시체를 가
져다가 묻었다.
묻을 땐 혹시라도 남았을 지문을 염려해 봉지는 다 회수했고 옮긴 시간은 밤 12
시 이후를 택해 사람들의 눈길을 피했다. 한마디로 용의주도하게 완전 범죄를 노렸
던 셈이다.
◆ "사회적 소외감이 증오심으로" = 전문가들은 유씨가 이처럼 잔인한 연쇄살인
마로 변모한 이유를 "분노와 증오로 변한 개인적.사회적 소외감이 공격적으로 표출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방적으로 이혼당한 뒤 그 원인을 자기 내부가 아닌 외부, 즉 전처와 전화방
여성에서 찾았고 이런 불만을 비슷한 직업의 여성으로 확대 적용, 무차별 살해에 나
섰다는 것.
또 자신의 불우하고 빈곤한 처지 역시 부자들이 자기 몫을 빼앗아간 탓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부자들을 응징해야겠다는 극단적인 적개심을 품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엔 사회에 만연한 '부자들은 전부 도둑'이라는 식의 부에 대한 왜곡된 인식
도 한 몫 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곽대경 동국대(경찰행정학) 교수는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선 사회가 전
체적으로 소외.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사회적 변화에 더 잘 적응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수사체계 개편 시급 = 살인 사건에 대한 종래 경찰의 수사는 광범위한 탐문
수사가 주요 단서가 됐다.
피해자 주변을 이잡듯 뒤져 원한 관계나 금전 관계 등을 밝혀내는 식이다. 그러
나 이번처럼 사적 원한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포괄적 적개심으로 인한 살
인엔 이런 수사 기법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도 자칫하면 영구 미제로 남을 뻔했지만 "마사지사들이 30대
손님의 전화만 받고 나가면 사라진다"는 전화방 업주의 제보와 검거된 용의자가 제
입으로 범행 일체를 털어놓으며 전모가 드러났다. 경찰 내부에서도 '하늘이 도와 범
인을 잡았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경찰의 현장 감식 능력을 강화해 사건 초기 단서를 확보하
고 캠페인을 통한 시민들의 의식 전환으로 경찰의 부족한 수사망을 채워줄 제보나
신고가 더 활발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사진설명) 18일 오전 서울지역 부유층 노인 및 전화방, 출장마사지 여성을 연쇄살인 암매장한 서울 봉원사 인근 안산계곡에서 경찰이 사체발굴을 하고 있다.(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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