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한국인의 슬픈 자화상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됐다가 풀려난 자국민 이주노동자 앙헬로 데 라 크루스씨에 대해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한 말이 인상적이다.

'8명의 자녀를 둔 크루스는 반드시 살아와야 할 사람이었다.'

20여명이 넘는 사람을 살해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온 나라가 경악에 가까운 충격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 거의 학살 수준의 살인을 저지른 한 사람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지금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이 처해 있는 위험하기 그지 없는 생존환경인 것이다.

필리핀에서 온 한 이주 노동자가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부자 나라에서 온 사람들한테는 잘해주면서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는 나쁘게 군다.

필리핀 사람들 한국에서 많이 슬프다.'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고백했듯이 지금 이 나라에서 슬픈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그러나 나는 사실 좀 부럽다.

그가 돈을 벌러 한국이라는 이국땅으로 왔듯이 그의 나라 사람들 중에는 또 살기 위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라크로 떠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조국이 그들에게 풍족한 삶을 제공해 주지 못해 먼 이국으로 떠날 수밖에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국가의 행복한 국민'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들 조국의 대통령이 국익이 아니라 그들 각 개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대통령이므로. 그들은 적어도 이라크로 간 한국인 노동자 김선일처럼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살해될 일은 없을테니까. 무고한 생명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그 죄값을 어떤 식으로든 치르게 해야겠지만, 그러나 그 한사람을 살인죄로 처단하고 나면 모든 좋지 않은 상황은 끝나는 일인가. 굳이 그렇지 않다고 말할 필요도 없이 살인범 하나 제거했으니 다시는 그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사건을 당대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국익을 포기하는 국가가 아니었던 이 나라가 '간첩죄'를 저지르고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 감옥에 갇힌 이들을 상대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했고 그 폭력의 결과로 간첩이었던 사람들은 죄값을 치르는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에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저항했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의문사규명위원회에서 결론내리기를, 그 죽음은(그들이 간첩이었든 아니든)결과적으로 이나라의 민주화를 촉진시키는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고 한 것에 '간첩을 민주화 인사로 둔갑'시켰다고 분개하는 이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이 나라가 혹은 이 나라 사람들의 의식이 아직도 명실상부하게 '민주화'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민주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의식을 민주화시켜 내기 위한 최소한의 성찰도, 반성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견해는 '간첩'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도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는 '생명'에 대한 성찰을 당대사람들에게 촉구한 것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사람의 치 떨리는 살인행각을 보면서 충격과 분개 이후에 우리 사회 사람들이 필히 거쳐야 할 단계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환경을 성찰하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국익을 위해서는 서른넷 젊은 청년이 목숨을 잃어도 부도덕한 전쟁터에 파병을 해야하고 자신의 내면의지를 지키기 위해 국가폭력 앞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더라도 그가 간첩이면 그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야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런 나라 안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은 어쩌면 이 나라 사람들 모두에게 개인이든, 국가든, '생명 하나하나에 대한 사무친 성찰'을 요구하는 사건인지도 모른다.

그런 성찰, 그런 반성없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위험하기 그지 없는 생존환경 속에서 일상을 곡예하듯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의 슬픈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공선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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