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0년 아기발도 휘하의 왜구가 이성계 장군에게 토벌됐다. 아기발도는 황산전투에서 죽었다. 그는 약탈을 위해 금강을 타고 내륙 깊숙이 침투했다가 포위됐다.
포위되자 인근의 산에 올라 농성을 벌이던 그의 부대는 새벽 어둠을 타고 탈출을 시도하던 중 궤멸됐다. 살아 도망친 자는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남긴 일기를 접수해 왜구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경로로 우리 땅을 침범했으며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살펴본다.
대마도를 출발할 때 순풍이던 바람이 탐라에 이를 즈음 역풍으로 변했다. 불길한 징조다. 선단은 기러기떼처럼 삼각편대를 형성해 물살을 가르고 있다. 앞선 척후선은 여전히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어쩌면 고려 해안에서 척후선은 필요 없는 지도 모른다. 고려에 수군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들겨가며 건너야 한다.
이번에 내가 이끄는 선단은 500척. 대규모 선단이다. 아무래도 내륙 깊숙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고려의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의 조창을 손쉽게 약탈했지만 요즘은 어렵다. 고려 정부는 조창을 모두 내륙 깊숙이 옮겼다. 우리의 계속된 탈취에 나름대로 대책을 세운 모양이다.
배의 크기는 길이 15m∼20m, 한 척에 13명씩 탔다. 물론 내가 탄 대장선과 약탈품을 싣기 위한 화물선들은 100명 이상 탈만큼 크다. 이번엔 대략 6천명이 출발했다. 이 정도면 대규모다. 고려가 조창을 내륙 깊숙이 옮긴 때문이다. 내륙 깊숙이 쳐들어가려면 대규모 선단 구성이 꼭 필요하다.
졸개들 중에는 기병도 700여명 포함돼 있다. 내륙 침투 땐 정규군과 맞닥뜨릴 위험이 크다. 그러나 기병과 보병이 연합작전을 펼치면 웬만한 정규군도 물리칠 수 있다. 적들은 우르르 덤비고, 우르르 화를 쏘아댈 뿐이다.
우리는 먼저 궁수와 기병으로 적의 대열을 무너뜨린 후 보병으로 밀어붙인다. 이런 전술에 적들은 낙엽처럼 흩어지고 죽었다. (중략…)
우리의 목표는 쌀이다. 대마도엔 쌀이 매우 부족하다. 매일 수십 명의 아이와 늙은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 요즘엔 쌀 외에도 비단, 불상, 불화 등을 훔치거나 빼앗는다.
일본의 토호들과 귀족, 대상들은 고려의 자기, 불상, 불화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고려의 자기나 불상, 불화는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품이다. 비싼 값에 팔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약탈했다.
건강한 남자들은 납치해 배를 젓게 하거나 물건을 운반케 했다. 때로는 고려군에 맞서 싸우게도 했다. 살아남은 자는 돌아가 노예로 팔았다.
졸개들은 여자들을 겁탈하고 죽였다. 금지령을 내렸지만 졸개들은 듣지 않았다. 졸개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모두 거짓말임을 나는 알았다. 그렇다고 엄격히 군율을 적용할 수도 없었다.
내전과 약탈에 찌든 졸개들은 사람의 도리 따위를 몰랐다. 게다가 졸개들 대부분은 무장수준이 높을 뿐 정규군이 아니며, 고려에서 한탕을 꿈꾸는 모리배들이다. 시대가 낳은 비극이다. (중략…)
적의 장수 이성계는 뛰어난 전술가였다. 육지에서는 패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까지 만난 적과 달랐다. 퇴로를 차단 당한 우리는 인근의 산으로 퇴각했다. 내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내륙으로 들어간 사이, 금강 하구에 정착해 둔 배는 모두 불태워지거나 빼앗겼다. 사방 30리에 걸쳐 숨어 있던 척후병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느라 이성계 군대의 공격을 몰랐단 말인가.
깎아지른 산을 성(城) 삼아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전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여기는 남의 땅이다. 앞 뒤 좌 우 어디나 적들이다.
얼마 간 더 버틴다고 지원군이 올 리도 없다. 남은 식량으로는 나흘 이상 버티기도 힘들다. 더 지치기 전에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부하들에게 저녁을 일찍 먹도록 했다. 쌀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배불리 먹게 했다. 보초병 몇 명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을 일찍 잠자리에 들게 했다. 내일 새벽 어둠을 타 탈출작전을 시작할 것이다. (끝)
아기발도의 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의 부대는 이튿날 탈출을 시도했고 이성계의 군에 궤멸됐다.
조두진기자earful@imaeil.com
※ 알림=왜구 ''아기발도의 일기''는 가상일기다. 그러나 아기발도는 실재했던 왜구의 우두머리이며 이성계 군에 궤멸됐다. 그들의 전술이나 병력 규모, 약탈경로, 약탈목적, 잔혹함 등은 역사서 내용을 그대로 옮기되 현장감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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