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계속되는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 올빼미족들은 오히려 신이 났다.
"이제야 내 세상이 왔구먼∼!" 한밤중에도 찜통 더위로 잠을 설치게 되는 요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을 누가 강요할 것인가. 새로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아침형 인간' 열풍을 따라가지 못해 스트레스 받을 필요도 없다.
10년만의 최고 무더위라는 2004년 여름. 밤을 잊은 올빼미족들의 세상으로 들어가 보았다.
# 밤 10시 대구 E마트 성서점
"으∼, 시원하다!" 할인점 안으로 들어서니 냉기가 더운 몸을 식혀주었다.
저녁 식사를 일찍 끝내고 피서 나온 가족 단위 쇼핑객들로 할인점 안은 대낮보다 오히려 더 붐볐다.
쇼핑 카트에 맥주, 수박 등을 담는 쇼핑객들. 그런데 쇼핑하다 말고 도서 코너에서 눈에 띄는 책을 골라 들고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주부, 어린이들의 모습이 참 기특해(?) 보였다.
"답답한 집안에서 아이들과 짜증내며 씨름할 필요없죠. 에어컨 켠다고 비싼 전기료 걱정할 필요없죠. 시원한 곳에서 아이들과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며 책 읽으니 얼마나 좋은데요."
밤에 애들을 데리고 할인점에 자주 나온다는 주부 이혜경(41·대구시 달서구 이곡동)씨는 큰 돈 들이지 않는 유익한 피서법으로 밤 할인점 도서코너 방문을 즐겨 이용한다고 했다.
24시간 영업을 해서인지 야간 쇼핑을 즐기는 올빼미족들은 자정을 넘어 새벽 3시 정도 돼야 조금씩 준다고 한다.
E마트 관계자는 "열대야 현상이 있었던 지난 22일 E마트 성서점의 경우 밤 10∼12시 1천357명, 자정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543명의 쇼핑객이 들렀다"며 "날씨가 더워질수록 야간 쇼핑객의 수가 늘고 있다"고 했다.
# 밤 11시 대구시 만촌동 패밀리 레스토랑 '팝스토리'
감미로운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가족,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는 이들이 많았다.
어른들 틈에 끼어 눈을 말똥말똥 뜨고 팝콘을 먹으며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자리를 함께 한 채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하는 모습이었다.
"아파트 주변에 갈 만한 곳이 별로 없어 좋아하는 음악도 들을 겸 가족이 밤에 자주 들러요. 집에서 더운데 저녁식사 준비할 필요없이 간단히 식사하고 맥주 한잔 마시고 라이브 음악을 들으면 가족의 정이 새록새록 쌓이지요."
남편, 아이와 함께 들렀다는 주부 박미정(39)씨는 "더워서 밤 잠을 설치는 아이를 재우느라 고생할 필요없이 이곳에서 놀다가 잠이 오면 쇼파에 잠든 아이를 안고 가면 돼 편하다"고 했다.
이곳에서 인기있는 라이브 밴드는 다 나이가 지긋한 뮤지션들이다.
가수 윤항기와 같이 보컬그룹으로 활동했던 안병철,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최건, 얼굴을 안 보면 조용필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서명빈씨 등 손님들이 좋아하는 뮤지션도 제각각이다.
흥이 나면 꼬마 손님들이 신청하는 '뽀뽀뽀' 노래도 즉석 이벤트로 선물하기도 한다.
주인 김준희(56)씨는 "어린이 고객이 많아 올 때마다 기념 사진을 찍어줘 10장을 모으면 돈가스를 무료 제공한다"며 "여느 술집과 달리 레스토랑이어서 어린이부터 30∼70대 고객이 더위를 식히려고 다양하게 찾고 있다"고 했다.
# 밤 12시 대구시 두류동 야외음악당 잔디광장
더위를 피하려고 시민들이 많이 찾는 야외음악당 잔디광장은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돗자리를 깔아놓고 쉬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잔디광장 입구로 들어서니 치킨 주문을 받는 사람 네댓명이 먼저 전단지를 나눠주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치킨 아주 맛있습니다.
돗자리를 공짜로 드려요."
밤에 음식을 먹으면 살찐다는 말도 별 효력이 없는 듯했다.
사람들은 한밤중에도 먹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즉석 배달되는 음식은 얼마나 많은지…. 시원한 맥주는 물론 생맥주도 배달이 되었다.
치킨, 피자, 아이스크림, 팥빙수, 뻥튀기…. 가만히 앉아서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음식 천지였다.
"날씨가 더워지면 음식을 배달하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고생이 심합니다.
술을 마시고 2, 3차로 오는 젊은 사람들도 많아 새벽 4시까지 음식을 배달하기도 하거든요."
치킨을 배달하던 한 남성은 새벽 4시쯤 돼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아이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영화를 보고 집에 가는 길에 들렀다는 회사원 김명철(43·대구시 달서구 두류동)씨는 "시민들에게 잔디광장을 개방해 마음껏 쉴 수 있도록 해 너무 좋다"며 "쓰레기를 직접 챙겨가는 등 시민들의 의식도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했다.
졸리는 줄도 모르고 어두운 밤 하늘에 반짝거리는 야광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즐거워 하는 아이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부부, 친구들, 남의 이목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돗자리에 드러누워 세상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든 사람들…. 그렇게 대구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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