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불영(佛影) 계곡에 다녀왔다. 계곡에는 기대와는 달리 물이 많지 않아 시원한 느낌은 없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산바람도 더운 열기를 몰아서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계곡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팔각정에서 잠시 쉬었다. 그곳에는 할머니 한 분이 손국수를 직접 밀어 팔고 있었다.
나는 손국수 한 그릇을 시킨 후, 밀가루 덩이를 홍두깨로 밀고 있는 할머니의 저고리에 눈길이 갔다. 삼베였다. 문득 지난날 삼베에 얽힌 생각들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왔다.
나는 초등학교 때 여름이면 거의 외가에서 보냈다. 군위군 의흥면의 속칭 베엘 마을은 지금도 내 어린 날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이고 그 언저리만 지나도 그립고 아쉽다.
어느 더운 날 아침이었다. 외숙모는 내 면 팬티를 빨아야겠다고 벗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새로 만든 누런 빛깔의 반바지 비슷한 팬티를 내 놓으셨다. 삼베 팬티였다.
나는 싫다고 하였지만, 마침 이 모습을 본 외삼촌의 호령에 안 입을 수가 없었다. 시원하고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느낌은 좋았지만 풀을 먹여 빳빳한 삼베는 걸을 때마다 사타구니와 허벅지의 연한 피부를 사정없이 스쳐 따끔거리게 했다. 그렇게 한나절을 시골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멱감을 때였다.
팬티를 벗은 나의 피부는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물 속에 들어가니 더욱 아리고 따가웠다. 그 날 저녁 멍석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 나는 울면서 삼베 팬티를 못 입겠다고 떼를 썼다.
외삼촌은 "남자는 사타구니가 아리도록 삼베로 단련해야 좋은 거야"하면서 웃으셨다. 외할머니, 외숙모, 외사촌 누나도 서로 장난기 어린 눈짓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렸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멍석에 누웠다.
마당에는 개똥벌레가 어지러운 몸짓으로 날고 매캐한 모깃불 속에서는 감자 익는 냄새가 났다. 하늘에는 여름 별자리들이 사금파리처럼 빛났다.
누나는 어느새 디딜방앗간 앞에 앉아 삼 삼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길고 넓적한 삼 머리 쪽을 왼 손으로 휘감아 쥔 다음 손톱으로 꼬집어 뜯듯 한 올 한 올 훑어 내리면서 삼째기를 했다.
삼째기가 끝난 누나는 둥글고 깊은 체를 옆에 놓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달빛에 허벅지가 드러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누나의 허벅지가 멍이 들었는지 검푸른 빛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허벅지를 만져보았다. 마치 딱딱한 거북의 등을 만지는 것 같았다. 누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밀치고는 삼을 삼기 시작했다.
재빠른 솜씨로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긴 삼머리 쪽 올을 삼꼬리 쪽 올에 이어 허벅지에 놓고 위로 한 번 밀고, 아래로 한 번 민 다음 둥근 체에 차곡차곡 쟁이는 것이었다. 설거지를 끝낸 외숙모도 삼 째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누나와 외숙모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맞춰 구성진 가락을 흥얼거리며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이따금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간간이 두 사람의 가락 속으로 끼어 들고,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등불처럼 걸려있었다.
안동포로 유명한 안동지방에서는 "길쌈은 배우면 업이 되고 못 배우면 복이 된다."는 말이 전해내려 온다. 그만큼 한과 고통이 삼베 올올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 동안 어린 날의 추억에 잠겨 있다가 "국수 다 됐어요"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할머니, 그 삼베 저고리 천은 할머니가 짠 것입니까?" "제가 짰지요. 그런데 이제는 힘에 부쳐서 많이 못해요. 그저 조금씩 짜서 도시에 있는 자식들에게 옷 한 벌 해주는 정도지요." "혹시 짜놓은 삼베가 있나요." "집에 한 필이 있어요. 지난해부터 올해 겨우 두 필을 짰는데 한 필은 남아있어요." 나는 국수를 먹으면서 할머니의 꾸부정한 등을 보니 아마 베를 짜느라 베틀에 오래 앉아있어서 그렇게 휜 것 같았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덥다. 30℃를 웃도는 폭염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삼베로 옷을 한번 지어 입어보자.
나는 전통적인 삼베옷이 우리의 입성에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비록 삼베는 고난과 설움의 베이나, 또한 그리움의 베인 것이다.
지금도 삼베옷을 걸치면 그리운 시절, 그 때 그 삼째기의 구성진 가락이 내 가슴에 서늘함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삼을 째세 삼을 째세/하루에도 천백번을/손톱으로 삼을 째서/고운 베나 잘 짜 보세/한 올 두 올 째다 보니/하루해가 다 되었네/선녀 같은 어여쁜 손/머슴 손이 다 되었네…."
하청호(시인.경북대 사대부설초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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