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계의 거장으로 대접받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가 신봉하는 세 가지 원칙 때문이 아닐까. 캐릭터, 이야기, 다큐멘터리 같은 진솔함은 그를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쉰들러 리스트'를 비롯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 'A.I.',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그의 전작들은 한결같이 지치고 힘든 현대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다큐멘터리식 영화였다.
27일 개봉하는 '터미널' 역시 스필버그적 특색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영화다.
게다가 스필버그의 의도를 유감없이 실행하는 톰 행크스가 있었기에 영화는 매력을 더한다.
전작 '캐스트 어웨이'에서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 이 할리우드의 희귀한 개성파 배우는 이번에도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공간에서 인간이 어떻게 적응해나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기본얼개는 단순하다.
동유럽의 크라코지아라는 나라에서 미국 여행을 떠난 빅터 나보르스키(톰 행크스)는 뉴욕 JFK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조국에서 쿠데타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그의 여권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정권이 전복된 나라 여권을 미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 결국 그는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미국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유령국가'의 '유령국민'이 된다.
영화는 공항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공항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한 인간의 생태학적 보고서를 그린다.
스필버그는 이번에도 실화를 바탕으로 스크린을 짰다.
모티브가 된 실화는 유엔이 발급한 난민증명서를 분실하는 바람에 16년간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노숙자로 살아온 카리미 나세리(59)의 삶. 이란 출신인 그는 영국 유학 뒤 귀국하지만 이란 왕정 반대시위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조국에서 추방당한다.
이후 영국, 독일 등에 망명을 요청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결국 파리의 한 공항 귀퉁이에 보금자리를 펴게 된다.
스필버그는 나세리의 삶에서 정치색을 덜어내는 대신 사랑, 감동, 웃음을 적절하게 섞은 그만의 색채인 유년의 몽상을 버리지 못한 어른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
어찌 보면 '어른들을 위한 한편의 우화' 같은 느낌이다.
그는 또 수많은 감시카메라와 칸막이로 짜인 공항, 콧대 높은 미국의 오만한 쇄국정책과 9'11 테러 이후 사뭇 비인간화된 사막 같은 그곳에서 애써 따뜻한 휴머니즘의 불씨를 지피려 든다.
영화는 시종일관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나보르스키가 어떻게 자본주의적 삶에 적응하는지 보여준다.
여기에 관료주의자인 공항 보안책임자 딕슨(스탠리 투치)과의 대립, 스튜어디스 워렌(캐서린 제타존스)과의 로맨스, 백인 청년과 흑인 여성 입국 심사관의 사랑, 고향 인도로 돌아가지 못하는 한 늙은 청소부의 꿈 등 공항 사람들의 애환을 끼워 넣어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약점을 극복한다.
하지만 영화는 한 인간의 관찰에는 성공하지만 '동기 설명'에는 왠지 찜찜한 모습이다.
9개월 동안 공항에서 갖은 수모를 겪은 나보르스키가 그토록 뉴욕에 가려 한 이유가 광적인 재즈 팬이었던 아버지가 생전에 얻지 못한 한 재즈 뮤지션의 사인을 받기 위함이었다니. 이 바람에 그의 삶에 깊숙이 빠져든 관객의 마음은 개운치가 않다.
또 미국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공항을 통해 미국적인 가치에 반기를 들려고 했던 스필버그가 가장 미국적인 재즈를 영화의 골격에 포함시킨 것도 아이러니 한 발상이 아닐까.
사족 하나. 이 영화의 볼거리는 공항이다.
스필버그는 9'11 이후 보안이 강화된 실제 공항에서 촬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20주 작업을 거쳐 캘리포니아 팜 데일에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실제 크기의 공항을 제작했다.
상영시간 128분, 전체관람가.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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