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경대기자의 영주 관광안내 자원봉사 체험

초보 말더듬이 안내원에 관광객 폭소

관광객 300만명 시대를 맞은 유불문화의 고장 영주.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누가 안내할까.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원봉사자들이다.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의 몸에 밴 친절과 도우미 역할은 국보급 문화재보다, 그 어떤 관광명소보다 더 유명해져 있다.

이미 외국인들까지 놀랄 정도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이들은 소수서원과 부석사의 단편적 모습과 역사적 의미 만을 전달하는 단순한 안내 도우미가 아니다.

그속에 살아 있는 선비정신과 시대적 상황까지도 소상히 전하며 민간외교관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앞치마를 벗어던진 주부 봉사자들의 하루 일과 속으로 들어가본다.

자원봉사자들의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한 곳은 사적 제55호인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서원입구에 마련된 3평 남짓한 관광안내센터는 막 청소를 끝낸 학생 자취방 같지만 깔끔하다.

이미 사무실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싱크대와 냉장고, 안내책자 사이로 8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다.

정겨운 이야기로 함박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다.

늦게 도착한 탓인지 봉사자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좁은 공간에 여자들만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엉거주춤.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듯 자원봉사 2년차인 장미숙(37)씨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서원의 효시이자 수많은 명현거유를 배출한….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

한바탕 자랑을 듣고나서야 겨우 분위기에 익숙해진다.

사무실 벽엔 이미 영주시청에서 퇴직한 김오섭 문화관광 과장의 글귀가 걸려있다.

얼굴에 듬뿍 미소가 담기면

미소찾아 사람들이 모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는

인정과 추억이 싹틔워집니다.

그래서 우리 영주관광도

미소와 인정을 가득담아

이끌어가야 합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자원봉사자 7년차인 김진순(49)씨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를 해보라고 시킨다.

안내도우미의 기본교육인 셈이다.

평소에 해보지 않던 말이라 왠지 쑥스럽고 낯이 뜨겁다.

간단한 기본 교육만을 받고 사무실에서 관광객을 기다린 지 한 시간.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전 내내 비가 내려 관광객들의 발길이 썰렁하다.

자원봉사자 강명숙(46)씨는 "평소 같으면 관광안내판이 빽빽한데 오늘은 예약도 없고 비가 와서 날을 잘못잡은것 아니냐"며 핀잔아닌 핀잔을 준다.

사무실 뒤편으로 보이는 서원의 정취는 한폭의 동양화다.

수령 300년된 소나무 뒤로 보일듯 말듯 얼굴을 내밀고 있는 서원에서 옛 선현들의 글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랜 기다림끝에 마침내 고참 봉사자들과 관광안내에 나선다.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어떻게 관광안내 역할을 해내는지 봐야 할 것 같아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다.

소백산 초암계곡에서 발원한 죽계(竹谿)천 넘어 바위와 송림이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내고 있다.

바위에 음각된 '경(敬)'자와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가 유난히 눈에 띈다.

단순히 현대적인 감각으로만 본다면 낙서가 분명해 글자를 새긴 사람은 벌금형을 받아야 할 판이다.

그러나 이 글자는 주세붕 선생이 새겼단다.

그렇다면 필시 무슨 연유가 있을 터.

안내를 맡은 자원봉사자 김명순(49)씨가 명쾌하게 의문을 풀어준다.

"경(敬)자는 유교의 근본정신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리글자이며, 세조 3년(1457년)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참살당한 의사들의 시신을 죽계천 백운담에 수장시킨 후, 밤마다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유생들이 밤 출입을 꺼리게 되자 주세붕 선생이 영혼을 달래기 위해 바위에 경자를 새기고 글자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제를 올려 울음소리를 그치게 했다.

그때 흘린 의사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이곳에서 약 7㎞ 떨어진 동네 앞까지 가서 멎었다고 해서 지금도 동네 이름을 피끝마을이라고…." 경전을 외듯 줄줄줄 문장이 이어져나온다.

전업주부 자원봉사자라기보다는 숙달된 관광가이드라고 하는 편이 더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소수서원에는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과 도지정문화재인 서총대친림연회도(유형문화재 제238호), 명종어필 소수서원 현판(유형문화재 제330호), 소수서원 소장판목(유형문화재 제331호) 등 국보급 문화재가 즐비하다.

자원봉사자 7년차인 김진순씨는 "지난 1997년 처음 시작할 때는 안내를 해드린다고 해도 마다하던 관광객들이 요즘은 관광안내 사무실을 먼저 찾아와 설명을 요청하고 있다"며 "한달에 7, 8차례 자원봉사 안내를 맡게 되는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괜히 마음이 설레 바쁘게 서둘게 된다"고 말했다.

"발이 부르트고 목이 메어도 안내하는 날은 즐겁고 안하는 날은 어쩐지 기분이 좋지않다"는 김명순 자원봉사자는 "관광객들이 돌아가서 고맙다는 사연을 담은 편지를 보내줄 때는 뿌듯하고 행복감을 느끼지만 가족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생활한다"고 고충을 이야기한다.

점심시간은 어디서나 즐겁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라면은 더 정겹다.

고참들이 준비해온 옥수수와 감자를 삶아 먹고 세상 공부하는 재미도 소수서원 관광안내센터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정감이다.

그러나 휴식도 잠시. 용기를 내 직접 안내를 맡기 위해 나섰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들은 대로 본 대로 애써보지만 서툴기만 할 뿐이다.

더듬거리는 사이 지켜보던 고참 김진순씨가 답답한지 어느새 앞을 가로막고 "소수서원은 주세붕, 최초의 사액서원, 수려한 자연경관, 유생들과 동네 처녀들 간에 벌어진 청다리에 얽힌 사랑이야기며…."

결국 관광객들의 웃음보가 터지고 만다.

어쩌랴. 관광객들이 즐거워한다면 그것 또한 자원봉사 아닐까. 애써 편한대로 생각해본다.

체험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자원봉사자들이 손에 무언가를 한다발 쥐어준다.

소수서원과 지역 관광명소, 문화재를 상세히 소개해 놓은 관광홍보 책자다.

부지런히 주위에 영주의 관광자원을 홍보해달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숙제를 안고 돌아서는 길이지만 마음만은 가뿐하다.

현재 영주시 관광안내 자원봉사자들은 통역을 포함 모두 28명. 이들은 소수서원과 부석사에 일일 4명씩 교대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까지 근무한다.

안내신청은 영주시청 문화관광과. 054)639-6062.

영주.마경대기자 kdma@imaeil.com사진: 소수서원에서 관광안내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마경대 기자.(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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