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신문사설-명나라 軍 뭐 하러 조선에 왔나

전투는 뒷전 강화 협상에만 신경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명나라는 이여송을 제독으로 화약총과 장거리대포로 무장한 5만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했다.

우리는 명나라 군이 그들 말대로 '당장에 일본군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군이 떠난 길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이여송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나눈 서한에서 "황제의 군대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적이 눈앞에서 온갖 패악과 노략질을 저지르는 판국에도 '황제의 군대' 운운하며 크고 아늑한 막사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명군은 자신들의 참전으로 조선은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물론 명군의 참전은 조선에 큰 힘이 됐다.

그러나 그네들 덕분에 조선이 나라를 구했다는 논리는 억지다.

왜란 중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는 대략 105회. 그러나 이 중 명나라 군대가 참전한 경우는 10건 안팎이다.

게다가 명나라 군대의 단독작전은 한차례도 없었다.

더구나 연합작전의 선봉은 거의 대부분 조선군대였다.

명나라 군대는 자신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조선땅에 왔음을 잊었나.

조선군대는 개전초기를 빼면 대체로 공격적이었다.

조선군이 먼저 공격을 감행한 경우가 방어전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게다가 65회의 승리로 패배 40회보다 우세를 보였다.

몇 차례 연합작전에 참가한 게 고작인 명나라 군대가 '황제의 힘으로 조선을 구했다'고 말하는 것은 염치없는 말이다.

조선 조정도 문제다.

일선의 장수들이 지원을 구하는 급보를 수시로 올렸지만 조정은 이를 묵살했다.

임금과 신하들은 명나라의 눈치보기에 바빴다.

백성들이 맨몸으로 적들과 맞선 상황에서도 임금은 명나라의 눈치를 살폈다.

더 큰 문제는 모든 군 작전권을 명나라에 넘겼다는 것이다.

작전권을 거머쥔 명나라는 강화회담에만 신경을 썼을 뿐 전투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명나라 군대에게 무제한적 살육을 감행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강화와 평화는 명군보다 우리가 더 절실하다.

문제는 명군의 이런 태도가 우리 백성의 학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2차 진주성 전투가 좋은 예이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2차 전투에서 10만의 군사를 동원, 성을 함락하고 3천500명의 병사와 수만 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작전권을 쥐고 있던 이여송은 무엇을 했는가. 그는 진주성으로 달려가지도 않았고, 적의 배후를 노리지도 않았다.

강화회담에 골몰했던 이여송은 기껏 왜장에게 사신을 보내 '진주성 공격을 그만 두라'고 했을 뿐이다.

적장이 "예, 그러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줄 알았나. 게다가 이여송은 차라리 성을 비우는 공성전이 어떻겠느냐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흘려 진주성 인근의 조선의병과 군대의 진주성 지원작전을 머뭇거리게 했다.

그 결과 수만 명의 주민과 3천500명의 병사들이 몰살당했다.

명나라 군대의 잘못은 이뿐만이 아니다.

전란에 찌든 백성들 사이에서는 '일본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속요가 유행하고 있다.

일본군의 약탈이 듬성듬성한 얼레빗 수준이라면, 명군의 약탈은 촘촘한 참빗이라는 얘기다.

조선인들은 명나라 대군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 돼지는 물론이고, 종자까지 바쳐야 했다.

조정은 온갖 명목으로 군량미를 거뒀다.

이렇게 거둬들인 군량미는 조선관군보다 명군에 우선 공급됐다.

연합군이었지만 조선관군과 명군의 식사는 질과 양에 있어 큰 차이를 보였다.

이 뿐인가. 백성들은 식량 운반을 위한 배와 수레를 만들어 바쳐야 했고 온갖 부역에 시달리느라 농사를 돌볼 틈조차 없었다.

명나라 군대는 걸핏하면 잔치를 벌였고, 조선 백성은 잔치 물자를 대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명나라 군대는 무엇을 하러 조선 땅에 왔는가.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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