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시대답다.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감히 닫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디까지 열릴 것인가. 그래. 열려서 좋지 않은 게 있을 리 없지. 열려야 한다.
열려서 좋은 우리들. 너무 열리는 게 되레 불안한 우리들. 혹 이러다간 우리들만 열리는 게 아닌가. 알 수 없는 불안. 열린 불안. 열린 우리들.
과거사도 열려야 한다.
외교안보도 열려야 한다.
수도도 확 열어야 하고 그리고는 골프장도 확 열어야 한다.
새만금. 540홀. 갯벌 값으로는 세계 최대임을 내세우면 된다.
그것이 어디 가당찮은 일인가. 덩달아 열린 물가. 한 때 철철 넘치든 장바구니는 지금 어쩌구니가 없을 정도로 텅 비었다.
기름값은 또 어쩌란 말인가. 겨울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세 자매는 귀금속상을 휘젓고 다니며 보석들을 훔쳐야 하고 아이들은 버려져 가정은 어느 틈에 동이 난다.
무료 급식소의 긴 줄은 갈수록 길어지고.
정현종의 '통사초(痛史抄)'라는 시가 있다.
한 번 읊어보자.
옛날옛날에 덫과 올가미가 살았습니다.
덫은 올가미를 노리고 올가미는 덫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돌뿐이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쇠뿐이었습니다
우리야 돌 속의 돌이요 쇠 속의 쇠였습니다.
덫이 올가미를 덮치는 순간 그야 올가미는 덫을 얽었습니다.
아, 덫과 올가미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함정으로 친 올가미와 덫이 오히려 함정에 빠지는 모순. 물론 우리는 돌이요 쇠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일테면 고관대작이었다면 온전했을까. 온전했을 리 없다.
왜? 덫과 올가미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 그들이니까. 그에 비해 우리는 생명 있는 돌이요 쇠라고 했다.
그래서 돌 속의 돌이요 쇠 속의 쇠라고 했다.
얼마나 든든한 돌이요 쇠인가.
'우리 옛글 백가지'라는 책이 있다.
백가지니 백장면이니 하는 시리즈들이 서가의 인기를 끄는 요즘 이 책도 그런 제목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꼭 권하고 싶다.
한학자라고 하면 무난할 조면희씨가 한문체를 우리글로 옮긴 것이다.
삶의 지혜와 정담이 가득한 선조들의 명문 백편을 나름대로 선정했다.
면면히 이어온 우리 문화의 숨결과 향기를 더욱 가까이 느끼게 한다는 게 이 책을 편 취지다.
이 책은 그 취지에 매우 다가가 있다.
솔직히 선조들의 글이 대부분 한자이기에 요즘 세대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돋보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선조들의 작품 중에서 고르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옮긴이의 말처럼 모래를 헤쳐 금을 고르는게 아니라 금에서 금을 고르는 어려움 끝에 백편을 골랐다고 했다.
그만큼 선조들의 명문들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최치원)', '뱃삯과 뇌물(이규보)', '도둑의 교훈(강희맹)', '남명 조식에게(이황)'등 그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혹은 생소한 선조들의 글들이 소롯히 담겨 있다.
제문에서 문학동호회 서문, 상소문, 기행문, 일본 국왕에게 답하는 국서 등 온갖 장르의 고문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옮긴이의 문체도 힘이 있고 때로는 잔잔하며 감칠맛이 난다.
읽으면 읽을수록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문화의 깊이를 스스럼없이 들이 쉴 수 있다.
조선 선조와 현종임금 치세 때의 학자 송준길(宋浚吉)의 '임금이 하사한 음식을 사양하는 상소(辭食物疎)'의 이야기. 임금으로부터 음식을 하사 받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스스로 분에 넘치는 대우임을 역설한 이 짧은 글 속에 오늘 출세 못해 안달인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말미에 덧붙인 말은 이렇다.
"…전하께서는 성심을 다하여 학문을 닦으시며, 실무에 돈독하시어 하늘이 내리신 꾸중에 귀 기울이시고,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을 이어 주십시오. 이는 큰소리 치고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윗자리에서 큰 소리 치고 말 잘하는 사람들은 꼭 읽어보아야 할 대목이다.
어디 이뿐이랴. 수많은 교훈들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글로 열린 책일 것 같다.
어디 열린다고 다 같은 열림일까. 이런 열림도 있다는 것을 오늘의 막무가내로 열리려는 시대에는 더없이 소중하고 귀중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연다고 무조건 열리리라는 계산이 얼마나 잘못인가를 알 수 있는 책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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