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메리칸 뷰티

늘 그렇지는 않다. 에로영화의 거장 잘만 킹이 즐겨 만든 욕정녀의 에로틱만 섹스는 아니다. 간혹 섹스는 고통스럽고, 허망하기도 하다. 또 질척거리는 찝찝함에 회한이 밀려오고, 슬픔이 배여 가슴이 저리기도 한다.

이 가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생각해보라.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나이더의 섹스는 에로틱이 아니라, 슬픔이고 고통이다. 서로의 이름조차 묻지 않고 아파트에서 화급하게 치르는 섹스는 절절한 고독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몰라"라고 외치는 슈나이더와 총에 맞아 껌 하나 겨우 남기고 숨을 거두는 브란도. 그들의 섹스는 상처받은 야수의 외로운 비명이다.

필자는 가을만 되면 '아메리칸 뷰티'를 본다.

'아메리칸 뷰티' 하면 여인의 나신 위에 흩날리는 장미 꽃송이를 가장 많이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가을마다 '아메리칸 뷰티'를 보는 것은 바람에 날려 다니는 비닐봉지 때문이다.

찬 바람이 불면 봉지도 날고, 종이도 날고, 먼지도 날지만, 그 하찮은 무기체의 움직임을 이렇게 아름답게 투영시킨 영화가 있었던가. 아버지의 폭압에 외부와 단절하고, 캠코더가 유일한 소통점인 리키(웨스 벤틀리). 그가 어느 날 바람에 일렁이는 비닐봉지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엿보게 된다. 아무도 눈길을 두지 않는 비닐봉지.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영혼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 중산층의 붕괴를 다룬 작품이다. 풀어내는 '무기'가 다양한 섹스의 코드다.

남편은 일어나 샤워하면서 자위하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고, 그런 무기력한 남편에 염증을 느낀 아내는 남자 사업파트너에 추파를 던진다. 딸은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며, 딸의 친구는 '섹스광'이다. 아빠는 딸의 친구에게서 욕정을 느낀다. 이웃남자는 극우주의자로 내면의 동성애를 밝힐 수 없는 전역군인이다.

정원에 핀 붉은 장미처럼 화려하고, 안정된 가정이지만, 모두들 곪아가고 있다. 극단의 벽을 쌓아두고, 겉으로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한다.

'아메리칸 뷰티'가 개봉된 것은 21세기를 앞둔 1999년이다. 매우 잘 만든 수작영화지만 배경이 미국이어서 그런지 그리 공감이 가지 않았던 영화였다. 그러나 불과 5년이 지난 지금, '아메리칸 뷰티'의 설정이 상당히 한국화된 느낌이다.

술집이나, 사우나에 가면 야릇한 눈빛의 남자들을 만나고, 권태에 찌들어 색다른 짜릿함을 찾는 여인들도 심심찮게 본다. 원조교제가 더 이상 신문에나 보도되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노골적인 섹스신은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과 버디(피터 갤러허)와의 여관신이다. 캐롤린의 추파가 싫지 않은 버디는 그녀와 자연스럽게 모텔을 찾는다. 캐롤린은 침대에서 자위하는 남편에 비해 세련된 버디에게 끌린다. 굶주린 그녀는 질펀한 섹스를 즐긴다.

감독은 그녀의 섹스를 상당히 과장되게 그리고 있다. 절정을 느낀 그녀의 고함소리에, 몸의 움직임도 크다. 굶주림과 일상의 탈출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그녀 또한 절박함의 끝으로 섹스를 찾았다는 것이 가슴 찡하다.

그래도 가장 고통스런 것은 중년의 가장 레스터 버냄(케빈 스페이시)일 것이다.

직장에서 밀려나고, 딸로부터 배척당하고, 아내로부터 외면 받는 전형적인 중년남이다. 그러나 내면의 뜨거움은 남아 있다. 그래서 몸을 가꾸고, 대학시절 이후 끊었던 대마초까지 피운다.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도하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까지 이른다.

딸 친구의 '몸 공세'조차 담담하게 거부하며 자신을 찾던 그가 전혀 예기치 않은 일로 죽음을 맞는다. 비록 그는 웃으면서 죽어갔지만, 관객은 그가 겪은 슬픔과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짜~해진다.

인간이 점차 단말기화되는 것이 현대사회다. 단말기는 선만 절단되면 아무 기능을 하지 못한다. 자가발전도 못하고, 커뮤니케이션도 불통된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칸 뷰티'가 시작되면서 나오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Today is the first day, in rest of my life). 에로영화만 찾는 에로킹이지만, '아메리칸 뷰티'의 이 말은 참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에로킹(에로영화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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