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국내 정치권의 친일진상규명, 정신대 문제 등 최근 과거사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각급 학교에서도 이와 관련한 시국선언과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해 대구의 교사 70여명과 필립 M 호세이 미국 뉴욕대 국제교육학과 교수의 토론 기회가 마련됐다. 주한 미국 대사관의 지원으로 8일 대구 중앙도서관에서 열린 '미국의 역사교육에 관한 세미나'. 세미나에 앞서 호세이 교수와 경북대사대부설중 오영국 사회과 교사가 양국의 역사교육에 관해 대담을 나눴다. 또 강의가 끝난 후 한국 교사들과 호세이 교수를 인터뷰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을 종합했다. -전문-
◆ 다양한 역사관 바람직
필립 M 호세이 교수는 이민의 역사를 바탕으로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다양성이 역사를 보는 시각에서도 적용된다며 미국 남북전쟁을 예로 들었다.
"하나의 전쟁이지만 이 전쟁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 남부인들에게 이 전쟁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에 자신들이 포함될 것인가 아닌가를 염두에 둔 전쟁이었다. 그래서 남부인들에게 이 전쟁은 남북전쟁이다. 그러나 북부인들에게 이 전쟁은 미국인들의 입장 차이에서 발생한 내전 즉 시민전쟁이다." 하나의 사실일지라도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호세이 교수는 "교육과 관련해 미국은 6만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으며 각 주, 카운티, 학교, 교사별로 모두 자신이 교과서를 선택할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선택권 보장이 수준 높은 수업을 이끌어 가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미국의 각 지역, 각 학교 교사들이 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국가차원의 획일적인 시험이 없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시험이 없는 만큼 학교와 교사는 다양하고 수준 높은 수업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오영국 사대부중교사는 지난 학기 학교 시험에서 '수나라 113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인은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정답은 '을지문덕'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게 답했다. 그러나 한 학생은 낯선 이름으로 정답란을 채웠다. 이 학생은 을지문덕을 따라 수나라 대군에 맞섰던 일반병의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교과서가 아닌 다른 책에서 읽었다는 것이다.
오 교사는 "그 학생은 수나라의 침입과 관련해 다른 학생 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했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정답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 교육이, 우리 사회가 그 학생의 답을 정답으로 인정해줄지는 의문이다"고 말했다. 왕조중심에서 기록한 역사만을 인정할 경우 학생의 답은 틀린 답이다. 이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실제로 역사를 보는 관점을 다양화해야 하지만 개인의 역사를 인정하는 데도 문제는 있다.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고, 역사를 적과 아의 투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 진실규명 의미있는 작업
오영국 사대부중교사는 최근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태도에 대한 호세이 교수의 입장을 물었다. 호세이 교수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중국은 그들의 정치적 역사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정치는 정치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그는 특히 서로 상반되는 견해에 대해 역사가들이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진상규명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호세이 교수는 "진실규명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과거에만 매달린다면 진보하기 어렵다. 진실을 밝히고 사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정치인들이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하면, 상대는 방어하기 위해 진실을 숨기려 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진실에 도달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지루한 공방이 이어진다. 진실을 밝히되 역사는 과거사로 인정하고 앞으로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오 교사는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정치권이 아니라 민간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과거의 역사를 하나의 가치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친일문제, 박정희 전대통령의 근대화와 독재 문제 등은 각각 그 영역별로 여러가지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관점에서 모두 나빴다, 혹은 모두 옳았다는 식으로 싸잡아 평가하거나 교육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 교육현장의 어려움
오 교사는 현장 교사의 애로를 이야기했다. 그는 "교사는 교과진도와 일정,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학생들과 오래 토론해야 할 부분이 있고, 그냥 지나쳐도 좋을 부분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는 매우 힘들다. 많은 교사들이 교과서 전체를 한번씩은 언급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잡혀 있다"고 말했다.
오 교사는 특히 "진도와 시험을 염두에 두다 보니 학생 스스로 공부해야 할 부분까지 교사가 챙긴다. 밑줄 긋고 외우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직접 자료를 찾아볼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교사가 하나하나 설명한다. 학생의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학습에 익숙해지다 보니 학생들은 두꺼운 책 한 권을 읽어낼 참을성도 없다고 지적했다.
학생이 해야 할 공부까지 교사가 대신 해줘서는 안 된다. 학부모는 자녀에게 '학교에서 뭘 배웠느냐?'고 묻지 말고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느냐?'고 물어야 한다. 역사교육에서도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기보다 역사관을 세우는 일 중요하다. 미국의 석학과 한국의 교사들은 이 같은 견해에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양쪽의 현실적 교육환경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이날 세미나는 강사로 나선 호세이 교수와 강의에 참석한 교사들간 강의 주제에 대한 인식 차이로 기대했던 토론에서는 다소 벗어났다. 그러나 세미나 전 대담과 세미나 후 인터뷰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역사교육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국내외 과거사 논쟁과 마찬가지로 이 대담에서도 한국인과 미국인, 즉 입장에 따라 과거사를 보는 시각이 다소 다를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사진: 8일 주한미국 대사관의 지원으로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에서 열린 미국의 역사교육에 대한 세미나.
이채근기자 minch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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