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부끄러움'의 미덕

'부끄러움'은 양심에서 비롯되므로 그것을 느낀다는 건 새삼 인간임을 확인하는 행위다. 성서(聖書)는 아담과 이브가 금단(禁斷)의 열매를 따먹고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때가 바로 원죄(原罪)를 저지른 숙명적 '인간의 길 걷기' 시작의 순간이었던 셈이다.

인간의 모든 도덕적 삶과 문화는,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부끄러움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의 자리에서 출발한다면 과장일까. 아무튼 부끄러움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미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반면 그 같은 미덕을 저버리거나 느끼지 못할 경우, 분명 문제는 커질 수밖에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를 인간의 범주 밖으로 내모는 일에 다름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한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이론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법이나 규범의 힘에 앞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그 행위는 인간 사회의 균형과 따뜻함을 지탱하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원형적인 안전판이 아닐까 한다.

맹자(孟子)는 일찍이 '뜻이 깊고 넓은 사람'을 '대장부(大丈夫)'라 했다. "사람이라면 부끄러움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에 그 뜻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며, 한 수 높은 위치에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 부끄럽고, 어떤 게 부끄럽지 않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했던 말이리라. 공자(孔子)로부터 이어지는 '인수지변(人獸之辨 )'이라는 말은 '사람과 짐승은 서로 다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같이 공맹사상(孔孟思想)도 사람과 짐승을 분명하게 갈라놓는다. 그 기준점을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과연 어떤가. 부끄럽다는 감각이 무디어지거나 아예 마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끄러움을 안다면 불미스런 일들이 거의 없어질 텐데 그렇지 못한 게 우리의 현실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 예로 부정부패.파렴치한.사기범.폭력배.가정 파괴범 등은 비일비재일 정도다. 특히 정치권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끄러움 상실'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더구나 누가 꾸짖어 보았자 자기 눈의 대들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다. 심지어 모든 걸 '내 탓'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적대감과 편가르기를 일삼는 경우도 없지 않아 보인다.

경제가 계속 곤두박질하면서 외환 위기 직후보다도 더 나빠졌다는 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온 나라가 혼란과 갈등에 빠져들고, 그 사정은 쉽사리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듯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갈등과 분열이다. 날이 갈수록 '좌'와 '우'로 갈리는가 하면, 자기편이 아니면 적으로 여기는 풍토도 덧나는 느낌이다. 역사적인 변전을 여러 차례 지켜봐 온 어른들은 이 양상은 마치 1945년 광복 직후의 '해방 공간'을 방불케 한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그런데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천심(天心)'이라 할 수 있는 '민심(民心)'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전통적인 미덕인 '수오지심'을 무색케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각계의 원로 1천500인이 시국선언을 한 뒤 동참하는 대열은 늘어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불교 조계종 법장 총무원장이 역시 집권세력을 향해 무게 있는 쓴소리를 했으며, 김수환 추기경은 또 다른 자리에서 더 구체적인 언급까지 했다. 하지만 과연 어떤 반응들이 나오고 있는가.

부끄러움의 상실이 곧 인간성 상실을 의미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나'만 잘나고 옳다고 나서는 건 '철부지'에 다름 아니며, '억지'라는 인상을 씻지 못하게 한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 염치를 잃어버려 온 국민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맹자의 '인불가이무치(人不可以無恥)'라는 오래된 말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지금도 체념하기에는 이르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태수(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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