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작은 살점·유품이 남긴 위력

비오는 새벽, 70대 할머니를 치어 숨지게 하고 달아난 운전자가 29일만에 잡혔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지만, 땅 속에 묻힌 할머니가 남긴 귀고리와 차량 유리조각에 붙은 아주 조그만 살점 한 조각이 귀중한 단서가 됐다.

8월19일 새벽 4시25분쯤 대구 중구 대봉1동의 횡단보도. 새벽기도를 가던 김모(74) 할머니가 차량에 치여 현장에서 숨졌다. 사고 차량은 그대로 달아났고 비도 내려, 경찰은 가해 차량을 추적할 실마리를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대구와 인근 시'군의 정비공장과 카센터에 할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밝힐 수 있도록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연락해 달라며 전단을 뿌리고 매일 확인전화도 했다.

10여일 후 경산시의 한 업소에서 임모(27·대구 서구 평리동)씨의 차량 앞유리가 파손된 것을 바꿔줬다는 전화가 왔다. 그러나 용의자로 지목된 임씨는 '증거를 대라'며 완강히 부인했고, 경찰도 별다른 증거가 없어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경찰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업소에 남아있던 유리 조각을 수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아주 작은 살점 한 조각이 붙어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 살점이 숨진 김 할머니의 것인지를 밝혀내는 것도 문제. 이미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한참 후였던 것.

그러자 할머니의 딸이 유품으로 귀고리 한 점을 갖고 있다고 연락해왔고, 경찰은 이 귀고리도 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유전자 DNA 분석 결과 귀고리에 있던 혈흔과 살점은 동일인의 것으로 판명됐다. 그제서야 임씨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이 사건을 맡은 사공양 경사(대구 중부경찰서)는 "피해자가 이미 매장돼 유전자 확보가 쉽지 않았으나 피해자가 남긴 귀고리에서 미량의 혈흔을 채취할 수 있었다"며 "뺑소니도 완전 범죄는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17일 임씨를 구속하고, 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했던 카센터 업주에게는 감사장과 포상금을 주기로 했다. 유족들은 할머니가 뒤늦게나마 모든 고통을 잊고 편안히 영면할 수 있게 됐다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문현구기자 brand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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