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참 쓸데없는 비가옵니다.
노래라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화실 구석에서 블랙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립니다.
컬컬한 막걸리같은 가수 김민기의 '봉우리'라는 제목의 랩이 흘러옵니다.
그러면, 어린날 다녔던 마을 어귀의 기억이 눈에 밟혀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환기 시켜줍니다.
유년,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다녔던 고갯마루의 주막이 그것이지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다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손가락으로 주전자 안을 찍어 빨던 텁텁한 맛은 어쩌면 나의 음주와 주점 출입의 시작인지도 모릅니다.
촌부들의 농사일이 술없이 어려운 노동이란 걸 허리 꺾어 쟁기질 해 본 사람은 압니다.
그 때는 당신께서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힘에 부치는 세상이 있다는 걸 어린 나로서는 몰랐지요. 아침에 눈뜨면 종기처럼 부식된 양은 주전자를 들고 개망초가 핀 비포장 도로를 검정 고무신을 끌면서 갑니다.
신작로 양쪽의 미루나무 둥치들이 빼곡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풍경이 신기해 보였습니다.
무엇을 옮겨보겠다는 마음이 이때부터 생겼지요. 흙 먼지를 뽀얗게 쓴 주막에 도착하면 때 절은 희미한 창문에는 서툴게(?) 쓴 '왕대포' '주류일체'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미처 붉은 색의 페인트가 마르지 않아 유리를 타고 흘러 글씨의 자간을 흐려 놓았지만 글씨의 꼴과 색은 내 눈을 잡아 놓곤 했지요. 간혹 요즘 그림에서 의도된 키치로 복제되어 향수를 자극하는 그림들도 있습니다.
이후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빨간색에 대한 애정의 연유가 이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알수 없이 깊게 각인된 까닭이기도 하겠지요.
유년기의 환영(幻影)이 지금 나의 그림에 떠 다니며 한 이력을 키워냅니다.
일곱살 여덟살, 그때의 고단한 경험이 퇴적되어 붓놀림에 견고함이 생겼습니다.
권기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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