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숙자들의 쓸쓸한 합동 차례

"지금은 가족 볼 낯이 없지만 내년 추석에는 달라지겠죠." 추석 날인 28일 오전8시 달서구 두류동 노숙자 쉼터인 근로자의 집. 10평이 조금 넘는 방에 30여명의 중년 남성들이 차례상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례상은 송편에다 산적, 갖은 나물과 켜켜이 쌓아 올린 각종 전들로 한가위 달만큼이나 풍성했지만 상 앞에 선 이들의 얼굴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이들은 오갈데 없는 처지의 노숙자들. 부모님 모시고 가족과 함께 '추석'을 보낼 수 없기에 더 괴롭고 쓸쓸하다.

2년째 합동차례에 참여하고 있다는 권모(48)씨는 "사업 한다며 집안의 돈을 이리저리 끌어쓰다 망한 처지라 가족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술도 끊고 식당에서 일 하며 자리 잡으려 노력중인데 내년에는 꼭 선물을 사들고 막내 아들 보고 싶어하는 어머니께 달려갈 것"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또 추석날 아침부터 끼니 해결을 못해 이곳을 찾은 이도 있었다. 김모(42)씨는 "2년전 사업이 망한뒤 아내까지 병으로 죽으면서 아이들을 시골 할머니께 맡기고 공사판을 전전했지만 품삯을 받지 못해 며칠을 굶었다"며 "갈곳 없어 결국 추석 아침부터 이곳으로 발길을 옮겼다"고 말했다.

이처럼 고향을 찾지 못한 이들은 현재 처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서로 위로하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눈물과 한탄으로 삭이며 추석을 맞았다.

'근로자의 집' 조현자(48.여)원장은 "다들 아픔이 많은 사람들인 탓에 특히 명절이 되면 분위기가 더욱 우울해진다"며 "이들 중 서너명은 형님 얼굴이라도 뵙고 차례를 지내고 오겠다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섰지만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가족이라고 찾아봤자 환영받지 못하는 탓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차례상에 술잔이 올려지면서 이들의 얼굴표정은 조금씩 달라졌다.

30대 한 노숙자는 "이렇게라도 부모님에게 명절 인사를 할 수 있어 다행"라며 "아마 저 뿐만 아니라 여기 모든 사람들이 내년 추석은 지금과 다를 것이란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건물 지하 노숙자 쉼터에서 올리는 차례상이었지만 술잔을 올리는 손끝에는 저마다 가진 깊은 사연만큼 정성이 배여 있었다.

한윤조기자 cgdream@imaeil.com

사진 : 고향을 찾지 못하는 노숙자들이 추석명절인 28일 오전 대구 달서구 근로자의 집에서 합동차례를 지내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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