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비의 배반

박성순 지음/고즈윈 펴냄

이전에는 몰랐던 세계나 새로운 시각의 지평을 열어주는 책과의 만남은 즐거운 일이다.

최근 출간된 '선비의 배반'이 그런 책 중 하나이다.

'선비의 그늘에 감춰진 조선 정치의 진실'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매몰돼 있는 선비에 대한 고정 관념을 뒤엎는다.

선비는 조선시대 지배층을 형성하던 양반 계급이 품은 이상적인 지식인상이다.

굳은 지조와 애국, 안빈 도락의 생활 태도를 지향하는 선비와 같은 지도층 캐릭터는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생긴다.

높은 덕망과 깊은 소양을 지닌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어찌해 당리당략·붕쟁을 일삼고, 국가의 안위가 백천간두에 선 위기 상황에서도 입씨름만 했을까. 선비가 지배층을 형성한 조선의 운명이 궁극적으로 왜 그리 되었을까.

저자는 성리학을 수학하고 사회통치 이념으로 운용한 사람들, 즉 선비들의 역사적·정치적 실체에 대해 비판적 메스를 들이대며 답을 찾는다.

책은 고려말 공민왕의 개혁정신을 이은 조선의 개창세력이자 개혁을 일구고자 했던 성리학자들이 조선 중기 이후 급격하게 사적인 영달을 추구한 역사적 진실과 배경을 훑어낸다.

◇ '성리학'은 사대부들의 정치적 무기

선비들이 이념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물질이 아니라 도의적 명분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인간의 도덕을 가장 강조했던 세력들에 의해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목적에 이용됐다고 저자는 보았다.

저자의 관점상 조선시대 성리학은 선비들의 심신을 수양하는 학문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왕권을 억압하고 국정을 장악함으로써 이른바 사대부 독존 사회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무기였다.

사대부들은 '왕에 대한 정신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왕권을 제약하려 했다.

왕과 사림간의 권력 다툼 속에는 '심경'(心經)이 있었다.

남송대에 편찬된 심경은 정작 중국에서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지만, 조선 왕실에서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였다.

심경에는 욕심을 없애고 본성을 되찾아 군자가 돼야 한다는 경계의 문구들이 담겨있다.

사대부들은 임금도 도덕적이어야 한다며 심경을 '경연'(왕의 정신 교육 프로그램)에 편입시켰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군주는 심경 강독을 경연에서 제외시키려고 시도했다.

효종과 송시열 간에 전개된 북벌 논의는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청의 정벌을 추진한 효종의 계획에 대해 송시열은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송시열은 북벌 계획에 원론적으로 동조하는 척하면서 고비 때마다 효종의 계획에 발목을 잡는다.

송시열은 심경 강독에 주력했으며 효종이 북벌에 대비하기 위해 몸소 무예를 연마하는 것조차 말렸다.

송시열 등 사림세력의 진정한 의도는 북벌이 아니라, 군주를 교화시켜 조선사회를 사대부 중심 사회로 만들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심경은 효종·현종·숙종 대에 극성을 부리다 정조 대에 완전히 사라진다.

이는 안동김씨의 세도 정국이 전개되면서 형식적인 국왕 견제장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개국 초기 조선은 부국강병책을 통해 여진을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강력한 나라였다.

그러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결여된 지배층에 의해 징집·토지제도가 누더기가 되면서 중기 이후 조선은 무수한 외세 침략을 경험하고 몰락한다.

◇ "실패한 역사 되풀이 하지 말자"

책은 정세에 따라 서인과 친하게 지내다가 남인으로 행세하고 나중에는 대북의 영수가 되는 등 소위 '철새 정치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이산해 등의 사례를 통해, 도덕적 명분론을 신봉하면서도 권력욕을 쫓는 사대부의 위선적 행태를 열거한다.

의병장 곽재우는 임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사림들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 생활 신세를 지다 결국 은둔의 길로 들어선다.

곽재우는 "충신, 열사가 제 명에 죽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고 한탄했다.

당시의 국정 현안을 도외시한 채 정파의 이익에만 몰두해 자신을 이리 저리 흔들어대는 사림과 세상을 향한 일갈이었다.

저자 박성순은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중이며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 천착해왔다.

책을 통해 그가 개혁적이고 진보적 사관을 가진 역사학자임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저자는 성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와 그것을 운용한 위선적인 인간들을 분리해 낼 시점에 와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려말 공민왕 이후 시도된 개혁이 사림의 조직적 반발에 의해 실패된 역사를 보여준다.

그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오늘의 상황을 고려말 공민왕 시대와 비유하며, "개혁은 목숨을 바칠 각오가 없이는 쉽게 달성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다.

저자도 유림과 후손들의 반발을 우려한 나머지 책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는 논문을 통해 심사 과정을 거쳤다고 밝히고 있다.

김해용기자kimh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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