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쓰거나 읽는 것이 생의 주요한 업이 되어버린 내게 가을은 특별한 계절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책에 대한 특별한 기획물이 쏟아지는 철도 이 때이고 평소에 책 한 권 읽는 것도 힘들어하던 이들이 '요즘 무슨 읽을 책 없나요'라고 인사로라도 물어보는 것이 이 즈음이다.
책 읽는 것을 연중행사의 하나로 치는 언론의 호들갑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인사말 속에 책을 집어넣는 것이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책이 이렇게 대접을 받는 철이 이즈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현상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가을을 가리켜 말들이 살이 오르고 한 수레의 책을 쌓아두고 읽기에 좋은 철이라고만 단순히 말해버리기는 어렵다.
하늘이 파랗고 햇살이 고슬고슬하고 바람이 삽상하게 우리네 골목을 채우고 가는 이즈음은 꼭 책읽기뿐 아니라 무엇을 해도 기분 좋게 시간의 보습날이 박히기 때문이다.
오랜 친구를 찾아가 술을 마시기에도 좋고, 하이든이나 베토벤 같은 고상한 음악을 듣기에도 좋고, 엽서를 쓰거나 요리를 하거나 음악을 듣기에도 너무 좋은 철이 이즈음인 것이다.
그래도 이 가을에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누군가 물어온다면 내 대답은 지극히 단순하다.
서점에 가서 여기저기 서가에 쌓인 책들을 기웃거리다가 마음에 드는 책들을 한아름 사들고 나오는 것이다.
시집 열 권 소설책 열 권 기행문 열 권쯤은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서점 이름이 박힌 큰 비닐봉지 두 곳에 이 책들을 가득 채워 낑낑거리며 서점 문을 나오고 싶은 것이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모처럼 서점 주인의 얼굴이 환히 펴질 것이며 서점의 손님들도 퍽 존경스런 눈빛으로 두 손에 들린 봉지를 바라볼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꼭 내가 들고 가는 서점의 책 봉지뿐 아니라 다른 이가 들고 가는 서점의 책 봉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저 이는 무슨 책을 저렇게 사 가지고 가는 것일까.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우고 봉지 속의 책들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는 것이다.
그런 내게 일간 슬픈 일이 생겼다.
슬픈 일이라 함은 지난 한 해 동안 정부 각 부처에서 구입한 도서의 권수와 구입비가 조간 신문의 문화란에 실린 것인데 국방부 3천53권, 환경부 2천745권, 문화관광부가 3등으로 1천265권이었다.
그리고 맙소사! 교육인적자원부 312권, 재정경제부 268권, 노동부 232권으로 최하위권이었다.
도대체 한나라의 문화정책을 책임지는 문화관광부의 도서 구입량이 1천265권이라니....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책 한 권 값을 넉넉히 만원으로 잡았을 때 문화관광부의 일년 도서 구입비는 겨우 일천만원이 될 정도인 것이다.
그렇다 치고 교육인적자원부의 312권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나라의 교육을 책임지는 주무 부처에서 일년에 312만권도 아닌 312권의 책을 구입했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눈을 닦고 주무르고 했던 것이다.
장관의 한 달 판공비보다 훨씬 못 미치는 이 도서 구입비는 우리 정부의 책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지극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인류 역사의 진보 과정이 그대로 들어있는 거울이다.
책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인류의 문명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역으로, 책을 소홀히 한 민족이 역사의 미래가 어떨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각 부처의 도서 구입비와 그 수효를 현재의 부끄러움을 닦을 수 있는 수준으로 현실화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도서 구입비를 파악하고 국민소득과 인구수를 대비하여 우리나라의 도서 구입비를 책정하는 것도 한 방책일 것이다.
눈부신 가을날 우리 모두 책 한 권씩을 들고 고향에 내려가자 . 툇마루에 등 대고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근사한 가을맞이가 아니겠는가.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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