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생활 중 학문과 사상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도전, 김만중, 정약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 이해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력을 잃고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귀양자들은 귀양지에서 독특한 유배문화를 남겼다.
정도전은 귀양 생활 중 자신의 개혁사상을 가다듬었다.
그는 귀양생활에서 닦은 학문을 바탕으로 조선개국에 큰 힘을 보탰다.
나라를 세운 후에는 '조선경국전' 과 '고려사' 등을 썼으며 조선의 법제와 정치적 토대를 마련했다.
남해의 외딴섬으로 귀양을 떠났던 김만중은 남편을 일찍 잃고 외롭게 살아온 어머니를 위해 소설 구운몽을 썼다.
특히 그는 '위리안치'형이라는 무거운 유폐형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우아한 문체의 소설을 남겼다.
위리안치 형은 유배지내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고 주위에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심어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형벌이다.
유배형 중에서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김만중은 구운몽에서 모든 부귀와 영화, 공명은 한낱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정약용은 순조 원년(1801) 옥에 갇힌 후, 그 해 10월부터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그는 후학들을 가르치며, 후세에 길이 남을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을 집필했다.
특히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고을 수령 즉, 목민(牧民)이 지켜야 할 지침으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귀양살이의 대우는 귀양지와 관직복귀 가능성에 따라 크게 달랐다.
먹고 살만한 고장에서는 귀양온 자들에게 일정한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
또 집집마다 날짜를 정해 먹을 것을 걷어 주거나 고을 전체의 주민이 생필품을 고루 거두어 귀양자가 머무는 집주인에게 주기도 했다.
특히 귀양 온 사람이 관직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면 백성과 관리들이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복귀할 가능성이 없는 자는 비록 정승을 지낸 사람이라 할 지라도 능멸과 모욕을 받았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은 "조금 궁하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지만, 크게 궁하면 동정하는 사람이 없다"며 귀양지 인심을 전하기도 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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