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詩와 함께

노을이 펄럭이다 나뭇가지에 앉았다, 저 너머 너머엔

울 할아버지적 할머니적 미투리와 나막신의 역사가

질박하다, 설운 유년마저 사박사박 단맛이 드는 계절;

나무지게와 새경살이의 한(恨)을 등테삼아

가난의 유산 한 짐 능금밭에 부으시며, 육날 조선낫처럼

그래 그렇게 무디게 살다 가신, 울 아버지 이력서 한 통이

붉게 매달려 익어간다, 사박사박 단맛이 든다

김창제 '능금밭'

*등테: 등받이의 방언

---------------------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은 장관이었다. 부석사를 오르는 길가의 사과밭 풍경 또한 장관이었다. 사박사박 단맛이 느껴졌다. 아무도 거기 없었으므로 허락도 받지 않고 가장 붉게 익은 사과 하나를 땄다. 펄럭이다 사과 나뭇가지에 앉은 저녁 노을을 훔친 것이다. 고물장수 시인 김창제의 눈으로 보면 내가 훔친 것은 풍경이 아니라 현실이다. 저녁 노을을 훔친 것이 아니라 미투리와 나무지게의 역사, 가난의 유산을 훔친 것이다. 바라보는 눈의 위치에 따라 능금 한 알의 의미가 많이 다르다.

강현국(시인·대구교대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