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기다림의 정치

정치의 과정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조화'는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설득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기다림이 필요함은 당연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밀고 나가는 일에도 다지고 다지는 시간의 거름이 있어야 꽃이 핀다. 그러나 우리 정치에서 기다림은 버려지고 있다. 기다릴 줄 모르고, 기다림은 개혁을 가로막는 어리석고 불필요한 일로 매겨져 간다.

서울을 옮기려던 정부의 구상이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혼돈에 빠진 것도 따지고 보면 기다릴 줄 모른 데서부터 출발한다. 10년이 걸릴지 더이상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을 다지고 기다리는 과정을 생략한 채 당장 매듭을 지으려한 때문이다.

행정수도 이전이 국가 공기업의 지방분산과 함께 국가 균형발전을 위한 초석이라는 정부의 의지와 철학을 설득하고, 그래서 서울이든 지방이든 어디에 살든간에 행정수도 이전이 나라 전체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생겨날 기다림의 여유를 갖지 않은 탓이다.

날치기를 없앤 국회의장으로 자부하는 이만섭 전 의장은 얼마전 사석에서 지나온 정치역정을 회상하며 "40여년 정치행로에서 강경파의 강행 결정이 성공한 예를 보기 힘들었고 얼마 가지 않아 파탄이 나곤 했다"고 했다. 대통령 탄핵의 역풍이 거셌던 것도 조금 더 기다리는 여유를 가지지 못한 야당 지도부의 조급함 때문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조급함이 국회 경위에 의해 국민의 대표가 끌려나가는, 있어서는 안될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게 했고 역풍은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지역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곧잘 해 온 "지역이 인재를 키우지 않는다"고 하는 말도 기다리고 인내하며 사람을 키워내지 못하는 지역의 급한 풍토를 자조하는 말이다. 빨리 실망하고 오래 지켜보지 못하는 환경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과실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무리다.

왕조시대 어린 임금들은 강하고 연륜 많은 신하들을 이겨내는 데는 시간이 최고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약하고 어린 임금보다는 나이 많고 힘이 강한 신하에게 먼저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기다렸다. 역사를 소설처럼 재미있게 풀어 쓰고 있는 이덕일 교수는 "시간은 당연히 그렇게 기다린 어린 임금의 편이었다"고 평했다.

기다리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몰락하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권력의 정점 가까이에 갔다가 무너지는 정치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정치부 기자로 여의도를 드나들며 바라 본 그들의 몰락에는 한결같이 조급함이 묻어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무너지기 바로 전 기회가 그들 앞에 다가와 있었다. "왔다"고 생각한 순간 무너짐도 항상 같이 왔었다.

"나를 지지한 사람만이 아니라 반대한 절반의 대통령도 되겠다"며 출범한 노무현 정부가 보수층은 물론 적지않은 지지층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설득하는 시간의 여유를 가지지 않고 하루빨리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조급성이 지지층을 잃게 만들고 앞으로의 방향마저 어렵게 하고 있다. 기다림은 결코 개혁을 가로막는 악덕이 아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지도자에게 세상 마음이 그렇게 숨가쁘게 따라와 주지 않는다.

여유와 기다림이 우리 정치를 조금더 유연하게 하기위해선 우리 정치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촉박한 시간의 제약을 주는 권력구조를 바꾸자는 말이다.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규정한 헌법을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5년안에 무언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의 구호시대 철칙같던 국가보안법의 개폐논란이 있는 오늘, 독재의 가능성을 우려하며 권력을 나누자고 타협한 5년 단임의 권력구조에 더이상 매달려선 안된다. 권력은 나누는 게 능사가 아니다. 국민의 자유를 늘리고 국민의 살림을 살찌게 하기위해 존재하는 권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권력구조를 바꾸는 일에 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나서야 한다. 그래서 "잘하면 다시 할 수 있다"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여유를 우리 정치판에 심어주자.

서영관 정치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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