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신문/반촌은 어떤 곳

조선의 수도 한양은 양반 거주지와 중인 거주지, 상인 거주지가 대충 구분돼 있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끼리만 살도록 제한된 공간도 있다.

반촌(泮村)이라 불리는 공간은 특수집단 거주지다.

반촌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언어와 풍습, 삶의 방식을 고집한다.

반촌에는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치외 법권지대 반촌은 어떤 곳인가.

-전문-

반촌은 치외법권지대나 다름없는 특별한 구역이다.

반촌에는 관군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

범인을 쫓다가도 반촌으로 숨어들면 추격을 포기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영조6년 반인들이 매우 해괴한 짓을 한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랐다.

한양 북부 장의동(壯義洞) 주위에 반인들이 나타나 생솔을 함부로 베어가고 있다.

관군들이 소나무를 베어 가는 자를 잡으려고 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성을 넘어 도주했다.

관군들이 도망치는 자들을 추격했으나 반촌으로 숨어 들어갔다.

관군은 반촌에 감히 들어갈 수 없어 범인을 잡아내지 못했다.

한양의 소나무는 가뭄과 홍수를 염려해 베는 것이 금지돼 있다.

그럼에도 반인들은 제 멋대로 소나무를 베고 있었다.

조정의 한 관리는 "금란(禁亂:소나무 벌채금지, 도살금지, 양조금지로 조선은 500년 동안 단속했다.

)에도 불구하고 추격할 수 없으니 반촌은 치외법권지대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우의정이 나서서 반촌을 수색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반촌인들의 해괴한 짓이 잦아들지 않자 영조는 성균관 대사성에게 반촌을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이 수색반대를 외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반촌은 성균관 주위에 붙은 마을인 만큼 관군이 들어올 경우 성묘(聖廟:공자를 모신 사당)가 시끄러워진다는 이유였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이 같은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얼만 전에는 성균관 근처에서 도둑을 체포했다가 포도대장이 파직되기도 했다.

성묘 근처에서 시끄럽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촌 주민들은 백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소의 도살과 판매에 관계하고 있고 천대받고 있다.

또 반촌민은 바깥 사람들과 친교, 결혼 등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결혼도 그들끼리 한다.

반촌 사람들의 모습과 풍습은 보통 조선사람들과 많이 다르다.

이들은 송도(개성)에서 이사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양말과 다른 송도 말씨를 쓴다.

말씨뿐만 아니라 만가지 물건에 붙이는 이름도 한양 백성들과 다르다.

남자들의 의복은 사치스럽고 화려하다.

길에서 만나면 금방 눈에 띌 정도다.

기질이 억세고 협기가 있어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또 걸핏하면 싸움을 벌인다.

싸움 중에 칼로 제 가슴을 긋거나 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한다.

정조 1년에는 반인 정한룡이 환도로 사람을 쳐 무릎 뼈를 절반이나 잘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 노름판을 돌아다니거나 협객 노릇으로 돈을 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촌인들은 쇠고기 도살을 전담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금지돼 있거나 말거나 조선에서 쇠고기 소비가 가장 많은 지역은 한양이다.

대부분 사대부 가문에서 쇠고기를 몰래 즐긴다.

그러나 백정은 이미 조선전기에 한양에서 축출됐다.

임진왜란 이후 '반민'들이 한양 시내에서 소의 도살과 판매권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