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너지는 농업(상)-겨울영농 사라진다

우리 농업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쌀 시장 개방과 함께 추곡수매제가 내년부터 폐지될 것으로 알려지자 영농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쌀과 과수 농가뿐 아니라 시설채소 재배농가도 중국산 농산물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의욕을 잃었다. 더욱이 기름값 폭등으로 난방비가 급등하자 겨울 농사를 작파하는 시설채소 농가가 속출하고 있다. 2004년 가을 경북지역 농촌의 현실을 살펴보고 농민 스스로 대체작목을 물색해 살 길을 찾아 현장을 찾았다.

문경시 농암면 농암2리와 가은읍 민지리간 지방도로 변. 1천여평 비닐하우스는 텅 비었고 비닐은 찢겨져 이리저리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예년 이맘때면 농민들은 오이·상추 등 시설채소 재배 준비로 분주했다. 그러나 올해는 아까운 시설을 놀리고 있다. 폐허처럼 변해버린 하우스 안에서 이정형(65·가은읍 민지리)씨는 재배하던 오이마저 걷어내고 있었다.

"불황 탓에 소비가 감소, 오이값이 불안한데도 기름값은 계속 올라 겨울 하우스 농사로는 수지를 맞출 수가 없어요." 이씨는 "농민들이 땀흘려 키운 배추밭과 벼논을 갈아엎으며 분노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경지역에선 영순면 30ha, 산북면 11ha, 산양면 6ha 등 52ha의 시설하우스에서 오이·상추·토마토 등을 재배했으나 올해는 겨울농사를 포기하는 농민들이 크게 늘었다. 영순농협 여석규 상무는 "지금까지는 오이·호박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있지만 날씨가 추워져 본격 난방이 필요하면 재배 포기 농가가 많을 것"이라고 전했다.

여 상무는 "시설 채소를 재배해 온 농민들이 영농비 급등으로 겨울 영농을 포기하고 있는 데다 추곡수매제 폐지로 내년 봄 이후 폐농이 속출할 것이란 우려가 높다"고 말했다.

상주지역도 고유가로 시설채소 재배농가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상주는 백다다기 오이, 가시 오이 등 겨울철 시설재배 오이 집산지다. 연간 1만9천300여t의 오이를 생산, 전국생산량의 절반(53%)이 넘고 경북도의 85%를 차지한다.

상주지역 농민들과 농협에 따르면 농업용 면세유(경유) 값은 지난 22일 현재 1ℓ당 440∼450원대에서 형성되고 있다. 지난해 10월과 비교해 1ℓ당 100원 이상 올랐고 3년 전에 비해 무려 250원이 오른 가격이다. 이에 따라 5천800여㎡의 비닐하우스 난방에 필요한 경유는 하루 600ℓ가량으로 26만원 이상 들어 지난해보다 10만원 이상 추가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시설오이 재배농 김형섭(53·상주시 화동면)씨는 "하우스 5동(800여평)에 오이를 재배할 경우 예년에는 겨울철 난방비로 1천여만원 정도 들었으나 올해는 1천300만~1천500여만원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며 "다른 대체작목이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지난 9월 파종해 최근 하우스안에 정식을 끝낸 상태"라며 걱정했다.

또 다른 오이 재배농 박재형(49·상주시 낙양동)씨는 "면세유 부족과 연료비 폭등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조기수확해야 할 형편"이라며 "농업용 면세유 배정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유와 석유 등 난방유 값 급등으로 겨울농사를 포기하거나 한 달 정도 늦추는 것은 군위지역 오이· 토마토 시설재배단지도 마찬가지다. 군위지역의 오이와 토마토 시설재배 면적은 95ha. 이중 에너지 절감용 보온덮개가 설치된 곳은 28ha로 전체 시설하우스의 3분의1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에너지 절감용 보온덮개를 설치하지 못한 농가는 난방유 값을 감당하지 못해 겨울농사를 한 달 정도 늦추고 있는 실정이다.

군위읍 정동에서 오이농사를 짓고 있는 홍성표(51)씨는 "한겨울 난방비를 감당할 수 없어 내년 1월 하순쯤 종자를 파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홍씨는 "12월 초순에 파종해 2월쯤 수확하면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으나, 난방유 값이 크게 올라 기름값을 제하면 남는 게 별로 없어 결국 12월 파종을 포기했다"며 "정동 일심오이작목반 소속 14개 농가 대부분이 12월 파종을 포기했다"고 덧붙였다.

시설재배 농가들이 난방유값 급등으로 겨울농사에 어려움을 겪자 군위군은 최근 오이작목반과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에너지 절감용 보온덮개 지원책 마련에 나섰다. 군위군은 내년도에 에너지 절감용 보온덮개 설치 예산을 확보해 시설재배 농가들을 지원할 계획이다.

문경·장영화, 상주·엄재진, 군위·이희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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