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김춘수 '이별을 위한 콘티'

가거라

산 넘고 또 산 너머로,

별이 없고

반딧불이 없다.

아기너구리 엄마엄마 울고 간 여름밤과

마디풀이 없다.

얼굴 감춘 마디풀이 내 발등

초가삼간 집 한 채 허물고 있다.

오지말라 오지말라고,

(누가 알랴

나는 역사허무주의자,)

김춘수 '이별을 위한 콘티'

오래 중환자실에 의식 없이 누워 계신 선생은 지금 별이 없어 캄캄한 산 너머를 더듬고 계실까, 초가삼간 집 한 채 들어서고 계실까? '가거라'라고 말하는 처연함도 '오지말라 오지말라'고 말하는 안타까움도 한 사람의 목소리이다. 오늘따라 갈등과 망설임의 저 목소리 가을비에 젖은 듯 애절하게 들린다.

허무란, 허무주의란 원래 소박한 믿음 저쪽 지적 회의의 산물인 것. 아기너구리 엄마엄마 울고 간 여름밤이 있는 이곳으로 주저 없이 오셨으면 좋겠다.

강현국(시인.대구교대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