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수목원을 거닐면서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이런 날에는 가을의 절정을 확인하고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먼 데 있는 산에만 단풍이 고운 게 아니라 대구 수목원에서도 가을의 절정을 만끽할 수 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두어 시간의 여유라도 생기는 날에는 자주 찾아갔던 곳이다. 여럿이 함께 가는 것도 좋지만 혼자라도 조용히 사색하기에 적합하다. 뭐니 뭐니 해도 걷기 코스로 이만한 데가 또 어디 있으랴.

나무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간다. 흔한 나무로부터 보기 드문 나무까지 익혀진 이름을 나직이 불러준다. 느티나무, 엄나무, 쥐똥나무, 주엽나무, 때죽나무, 자작나무…. 한참을 걷다가 은은한 향내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름표를 보니 '구골목서'라고 적혀 있다. 목서의 향기에 반했다던 어느 분의 글을 읽고 어떤 나무일까 몹시 궁금했는데 오늘 마침 숙제를 해낸 셈이다. 유난히 푸른 잎에 눈송이같은 꽃을 달고 눈길을 끈 나무, 그게 바로 내가 찾았던 나무였다니 덤으로 얻은 기쁨이다.

갈 때마다 나무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지만 나무 아래 땅을 덮고 있는 야생초의 모습은 철따라 달라져서 그걸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제는 둘러봐도 구절초와 산국, 보랏빛 용담뿐 다른 꽃들은 씨앗 만들기에 지쳐 스러져가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온통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비더니만 이제 국화에게 열광의 자리를 내어주고 키 큰 대궁이만 뻣뻣하게 남아있다. 이처럼 자연은 스스로 자기의 때를 알아 꽃 피웠다 꽃 지우고 서로를 탓하지 않고 잘도 지낸다.

더 안쪽으로 걸어가니 숲 향기가 다가오는 듯하다. 숲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질 좋은 흙, 짐승들의 생활 터전, 이 땅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일, 철따라 변모하는 초목들이 엄청나게 많은 구경거리를 준다. 주제를 정하고 둘러보면 훨씬 더 재미있다. 나무의 이파리만 보아도 이름을 알아낼 만큼 눈여겨보는 것은 물론이고 특징적인 표피, 꽃, 열매까지도 각기 다른 점을 찾아보니 이내 친해진다. 뿐만 아니라 바삐 지나온 나날에 작은 쉼표 하나 찍으며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된다.

분재원 앞에 섰다. 어느 시민이 기증한 작품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바로 옆 선인장온실에서도 그랬듯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던 식물을 사회에 환원시킨 무소유의 마음이 돋보인다. 한 바퀴 둘러보았더니 이제 쉬고 싶다. 수목원 벤치에 앉아서 올려다 본 하늘은 푸르디푸른 호수 같다. 구름 몇 조각 걸쳐진 하늘에 새 몇 마리 날아가는 것만 보아도 푸른 물에 내 마음이 헹궈진 듯하다. 끝없이 맑은 하늘을 오래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따라 부풀어 오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저 작으나마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소박하게 염원한다. 그러다가 조금만 힘들어도 그 꿈을 쉬이 포기해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꿈이 현실이 된 현장에 내가 지금 앉아있다. 이 수목원이 만들어진 것은 국토 재활용 차원에서 높이 평가받을 일이다. 아름다운 휴식공간이며 자연학습장이 된 이곳이 불과 몇 년 전에는 쓰레기 매립지였다니 상상도 안 된다. 수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지기 전에는 악취가 진동해서 인근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는데 이처럼 아름다운 공간으로 변했으니 굉장한 탈바꿈이다. 건설 잔토로 복원되었다지만 친환경공간으로 꾸며져 시민들의 넓은 정원이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처럼 이곳을 거니는 우리들도 저마다의 꿈을 키워보면 어떨까.

다시 쉬엄쉬엄 걷는다.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길을 들어섰다. 한 무리를 이룬 중학생들에게 늙수그레한 어른이 나무에 대해 열강을 하신다. 나도 그 일행 뒤에 서서 설명을 들어본다. 불현듯이 내 마음 속에도 자원봉사자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일렁인다. 우리도 저마다의 소질을 일구어서 보람된 일을 계획해볼 일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꿈이 있는 자들은 주저 말고 수목원에 가서 새 생명의 현장을 체험해 봄직하다.

김경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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