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윤채기자의 홍게 가공 체험

동해안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수산물가공회사는 '보물급'으로 통한다. 한때는 수십개에 달했고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해안 주민들의 절대적인 소득원 역할을 했던 수산물 임가공회사들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가동 중인 업체는 몇 안된다. 손에 꼽을 정도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수산물 가공회사에 밀려 대부분 문을 닫았다. 남아있는 업체들도 겨우 숨을 쉬고 있다.

강구에 있는 세웅수산. 홍게 가공 전문업체인 이 회사 역시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그러나 지금은 긴 터널을 지나 자리를 잡았고, 날로 성장까지 하고 있다. 위생상 여러 문제를 들어 외부인의 입장에 대해 난색을 표명, 몇 번의 요청 끝에 겨우 체험 승낙을 받아냈다. 도대체 홍게는 어떻게 가공, 식탁에 오르는지 우선 궁금했고, 한때 영덕 경제를 떠받쳤던 수산물 가공회사들이 왜 줄줄이 도산할 수밖에 없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첫째도 청결, 둘째도 청결, 마지막도 청결입니다." 홍게 가공분야에서만큼은 자타가 기술력을 인정하는 장운용(46) 공장장은 장화부터 건네주며 "회사의 룰은 어느 누구도 깰수 없는 불문율"이라며 '청결'을 거듭 강조했다.

홍게 임'가공 경우 크게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우선 원료 확보. 가장 중요한 것임은 물론이다. 회사가 홍게잡이 배를 구입, 직접 경영하기도 하지만 대게 독점 납품 계약을 체결한 선주들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이때 회사 측은 선주에게 잡은 홍게를 안정적으로 독점 공급해 달라며 수억원을 선불금조로 지급해주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자숙실과 가공실을 차례로 거쳐 상품화하는 공정이다. 장화를 갈아신자 일단 먼저 배치된 곳은 자숙실. 이곳은 동해에서 잡혀온 홍게를 상하기 전에 게살과 게장 등으로 구분, 일단 100℃ 이상의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놓는 작업장으로, 실내에는 강구항에서 새벽에 실어온 홍게가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채 수북히 쌓여 있었다.

주어진 임무는 1차 가공전 컨베이어로 이송되는 중간에 상한 홍게를 선별, 찍어내는 것. 이 정도 쯤이야 싶다. 그러나 서툴기 그지없다. 손놀림이 보이지 않는 맞은편의 아줌마들이 "그렇게 일해서 먹고 살겠어요"라고 당장 되받아친다. 30분 정도 지나고나니 자동탈각기 등 기계소음으로 귀가 멍멍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다리살과 몸살, 집게살, 게장으로 나눠지는 공정별로 조금씩 옮겨다니며 세시간 정도 일하니 점심시간이란다. 구내식당에서의 몇 안되는 반찬, 그러나 현장에서의 노동 뒤 배고플 때의 식사는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다.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권복례(54'강구면 하저리)씨는 "물론 힘들지요. 그러나 농사짓는 것보다는 좀 수월합니다. 수입도 안정되어 있는 편"이라면서 "요즘 같은 시기에 일할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고 했다. 초창기 멤버로 20년째 일한 그는 팀장의 반열에 올랐다며 "회사가 경영난을 겪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극복, 이제는 안정궤도에 진입한 것이 무엇보다 보람"이라면서 뿌듯해했다.

오후에 주어진 작업공간은 가공실. 오전에 자숙시킨 홍게살 등을 가져와 상품화하는 작업장이다. 일본의 수입바이어들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우선 까다롭기 그지없다.

"불편하더라도 참으세요." 흰 장갑과 망사, 위생모, 마스크, 위생복을 다시 챙겨주는 장 공장장이 왜 참으라고 했는지 이해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공실에 들어가기 위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서도 무려 10단계를 거쳐야 할 정도로 영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알코올 손 소독→살균 처리된 장화 착용→롤러 사용 머리카락 제거→에어샤워기→장화 소독→손 염소 소독→손톱세척→에어타월→알코올 손 소독을 하고서야 입실이 허락됐다. 이 과정은 식품회사의 특성상 이 회사 대표는 물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고 한다.

"아, 하나 더 있어요. 가급적 옆사람하고도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장 공장장은 "침이 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가공실에서는 마스크를 낀 채로 작업 중인 아줌마들의 침묵만이 있을 뿐 조용하기 그지없다. 작업장을 돌던 팀장들이 수시로 개인별로 지급된 소독분무기를 이용, 손을 씻으라고 한다. 이 회사 제품이 까다로운 일본시장에서 안전성을 입증받은 이유를 알 만하다.

한 아줌마는 "이 공장에서의 하루 일과는 씻고 소독하다 보면 끝난다"면서 "원체 여기서 깨끗하고 말끔하게 행동해야 해 퇴근 후 집에 가면 집안 일은 귀찮아서 대충한다"고 했다. 기자에게 배당된 일은 자숙실에서 넘어온 홍게살 등에서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 제품이 수출입 과정에서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하는 만큼 정신을 집중해 일하라고 재차 강조했다.

대낮같이 밝혀진 백열등 아래서 30여분쯤 지나니 눈이 아파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남들 눈도 있는데. 다행히 이날 홍게 반입량이 적어 오후 4시쯤 지나자 일이 마무리됐다.

오늘 작업한 물량이 머잖아 일본 수출길에 오른다고 생각하며 작업장을 나서니 왠지 기분이 좋다. 장 공장장은 "홍게 임가공은 작업상 하루 종일 서서 일할 수밖에 없다"면서 "무리하면 불량품이 나올 수 있는 만큼 일요일은 가능한 한공장 가동을 멈춘다"고 했다.

가공실을 나서던 한 아줌마가 "어때요. 일할 만합디까"라고 묻는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자 "이름 없어요"라며 사라져 버린다. 옆에 있던 아줌마들이 "올해 15년째 일한 근속자지요. 세웅수산에서 번 돈으로 5남매 중 4남매를 결혼시켰다" 면서 "이름은 이말자, 나이는 60세"라고 일러준다. 집으로 가는 통근버스에 오르는 100여명의 아줌마들 소리로 밖이 왁자지껄하다. 하루종일 쉬는 시간 제외하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던 그들이 수다로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 같다. 그 수다속엔 하루의 피로를 풀려는 지혜도 담겨 있으리라.

영덕'최윤채기자 cy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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