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수순(手順)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의 김응룡 감독이 구단의 사장으로 선임됐다. 요즘 이만한 신선한 뉴스 감이 있었던가. 프로야구 팬들에게는 잔잔한 감동까지일게 만들었고 국내 프로스포츠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파격의 미까지 덧붙여졌다. 운동감각이 둔한 사람들에게조차 눈이 번뜩 뜨이는 사건. 아무도 예측 못한, 아니 예측 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어디까지나 수순이라는 엄연한 질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야구를 통해서 그가 밟아왔던 길에는 숱한 장애가 있었을 터이고 그 장애를 딛고 지금의 환경이 만들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랄 수는 없다. 물론 운도 겹쳤겠지만 단순히 겹친 운에 무게를 둔다면 세상일은 온통 운 투성이가 될게 뻔하다. 그러나 세상일은 운으로는 안 된다. 바로 수순에 순응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는 후배에 길을 터 주기 위해 물러날 것을 원했지만 구단은 되레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겼다. 사람들은 그래서 더 많은 박수를 쳤다.

지금 우리사회는 너무 수순(手順)을 무시하고 있다. 수순이 없다. 차분히 순서를 밟아 나아가고 예측하고 그래서 모든 일에 대비하는 자세들이 없어졌다. 이 바쁜 세상에 언제 순서를 밟아 나아가고 예측하나. 그런 친구들에게 세상은 어김없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축으로 몰고, 둔하고 눈치 없고 아집에 머문 머저리로 치부해 버린다. 수순을 파괴해 버린다고 별로 환경이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오죽하면 괴테도 "하늘에 우주의 법칙이 흐르는 것처럼 내 가슴에는 도덕의 법칙이 흐르고 있다"고 일갈했겠는가.

이전투구 판인 우리의 정치만 해도 수순은 찾아 볼 수 없다. 민초들의 어진 세금만 아작아작 씹을뿐 공전만 거듭하는 국회. 어디를 봐도 그들에게 풀어 보려는 수순은 없다. 고함과 삿대와 패악질로 일삼는 훈수만 있을 뿐 정연한 바둑판의 수순, 그래서 돌 던질 자리를 찾는 수순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도이전 문제가 헌재 까지 갈 턱이 없지 않은가.

총리의 사과는 어떤가. 억지로 해댄 사과를 표 내기라도 하듯 어찌 뒤끝이 그리 찜찜한가. 찜찜한 사과를 왜 하는가. 해본들 언제 또 다른 각에서 불거져 새로운 불씨로 작용할지 미리부터 걱정이다. 괜한 걱정인가. 그저 순서대로 살아가는 민초들의 각에서는 보상 없는 손실만 더해지니까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그것이 총리의 수순이라면 찜찜한 것은 당연하다. 라디오에서는 대통령이 부동산을 잡겠다고 해 놓고 곧바로 이튿날 신문들은 이를 뒤집기 하듯 부동산정책이 완화될 징조라며 그 이유들을 내놓았다. 어느 것이 바른 민생을 살리는 수순인지 도시 알 턱이 없다. 모두 수순을 무시해 버리는 습관에 물든 관용 탓이다.

함께 길을 가던 나귀와 개가 땅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보고는 나귀가 그것을 주워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개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고. 그것에는 건초, 보리, 밀겨와 같은 먹이를 다루는 내용이였다. 귀가 솔깃해진 개가 아무리 들어도 맛있는 내용이 없자 "이보게 좀 더 아래쪽을 보게나. 조금 건너 뛰어 읽으면 고기나 뼈다귀이야기가 나올지 모르잖나"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나귀가 다 읽어 나가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개조차 건너 뛰어 수순을 무시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 할 필요가 있겠는가.

수순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두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자신들은 수순을 무시하면서 그 무시한 것에 저항하면 야단이라는 점이다. 특이한 구조다. 무시하면 저항은 생기게 마련인데 이것이 싫다는 것이다. 왜 싫을까. 권위를 떨어뜨리고 인정을 하려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 바보 같은 사고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유는 공기의 저항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모르는가. 직진하는 힘에 대한 공기 저항이 날개에 작용하면서 거대한 비행기를 밀어 올리는 것처럼 저항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높이 날아 오를 수 있는 힘을 받게됨을 알아야 한다. 어느 조직이든 말이다.

다른 한가지는 그 주위에 온통 아름다운 말뿐이라는 점이다. 말이 아름다운 것은 꾸며지기 때문이다. 꾸며진 것에 진실이 있을 리 없다. 노자도 '信言不美 美言不信(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못하다)'이라고 했다. 수순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주위를 살펴보면 모름지기 저항과 아름다운 말뿐임이 새삼 느껴지는 세태다.

김채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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