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신문-양국에 가해진 외부압력의 차이

조선과 일본의 개방은 약 2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와 함께 양국에 가해진 개방압력의 성격 면에서도 크게 달랐다. 이 역시 조선과 일본이 개방 이후 전혀 다른 길을 걷게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중무장한 함대를 앞세워 일본을 개방시킨 페리 제독은 "우리는 통상을 원했다. 특히 태평양 항로를 통한 중국 무역에 관심이 많았다" 며 "증기선의 해난 구조와 증기선의 석탄 및 식료품 공급기지를 필요로 할 뿐이다"고 말했다. 페리 제독은 "솔직히 우리가 일본과 맺은 조약이 평등한 조약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조약이 일본의 국내 산업과 상업망을 붕괴시킬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일본의 면직업을 상당히 몰락시켰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일본에 대한 경제적 외압은 경제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약탈이라기보다 불평등한 거래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협정문서에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 조항이 없어 일본 정부의 자주성이 보장됐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서양 국가들은 일본에 대한 정치적 점령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미국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 4개국 연합함대가 1864년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외국 선박의 연료와 식량공급, 비상시 상륙허가 등이 있을 뿐 군사적 점령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조선을 개방시킨 일본의 태도는 달랐다. 조선과 수호통상 조약을 맺은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는 비공식 발언을 전제로 "우리의 목적은 정한론에 입각한 정치적 복속이다. 조선을 점령한 후 동아시아를 한데 뭉쳐 서양 열강에 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후 인천을 점령했고, 갑오농민혁명 때도 군대를 동원해 강제 진압했다. 1894년에는 대군을 주둔시킨 상황에서 김홍집 내각을 강제 출범시켰다. 정치적 내정 간섭이었다.

일본의 한 정치학자는 "일본은 서구열강과 달리 뒤늦게 자본주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뒤늦은 출발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외국자원 수탈이라는 저급한 방식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일본은 조선에서 거의 약탈에 가까운 곡물 및 자원 수탈을 감행했다. 또 선진국 문물을 조선에 중개 무역함으로써 조선의 수공업을 쇠퇴시켰다. 일본의 집요한 수탈로 조선은 거의 회생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차이점은 또 있다. 명치유신이 발생했을 당시 일본의 개화세력들은 외국군대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서양 각국은 인도 세포이의 난, 중국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일본에 관심을 기울일 형편이 아니었다. 서양 각국이 중립을 지킴으로써 일본에 개화정부가 들어서는 데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조선의 갑신정변은 달랐다. 갑신정변 주동 세력인 김옥균은 "우리가 준비를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청나라가 무력을 동원, 진압하는 바람에 개화정부 성립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말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은 내부적 성장 동력을 얻을 기회조차 놓치고 말았다.

조두진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