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신문-외부 압력 대응 양식

조선과 일본은 19세기 중반 비슷한 형태의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양국의 경제수준도 엇비슷했다. 그러나 1854년 일본의 개항과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양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했고, 조선은 식민지의 길을 걸었다. 이 같은 결과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 양국의 대응양식이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했다. 외세의 개방 압력에 직면한 양국이 취한 태도를 추적했다.

-전문-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개방 압력에 조선의 집권층은 단호히 대응했다. 1866년과 1871년 두 번의 서양 세력과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조선은 이를 패배로 인정하지 않았다.

흥선 대원권은 "우리측 피해가 얼마나 됐든 간에 서양 군대가 물러갔지 않느냐"며 "문을 더욱 굳게 닫아걸고 나라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양인들의 대포나 총칼이 우리보다 우수할지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야만인이다"며 "야만인들과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대해 조정의 젊은 관료는 "서양인들은 대포로 밀고 들어오는데, 대포의 힘을 평가하지 않고, 문화수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 이라며 "서양의 과학기술은 중국보다 앞서 있다"고 아쉬워했다.

집권층이 서양의 힘을 멸시하는 태도와 관련, 한 정치학자는 "조선의 문화는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며 "이런 문(文)중심 사상이 현실적 힘인 무(武)를 깔보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예컨대 시(詩)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칼은 두 가지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다. 단단한 칼이 무른 칼을 부러뜨리는 것은 자명하다"고 말해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겼다.

일본도 서양을 오랑캐로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조선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쉽게 굴복했다. 일부에서는 싸워보지도 않고 대포 몇 발에 굴복하느냐는 비판도 일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한 고위 무사는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전쟁의 공포에 시달려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전국시대 종식은 다분히 힘으로 힘을 눌러서 유지한 평화였다"고 말하고 "무가(武家)지배 체제에서는 사람도 모두 병참물자로 계산될 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서양이 오랑캐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의 대포가 우리 대포보다 성능이 좋다. 그들의 총이 우리 총보다 강하다. 싸워봐야 우리는 진다. 그러니 패배를 인정하고 그들의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인 것은 옳다"고 덧붙였다.

일본은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재빨리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막강한 군사대국으로 성장했다. 재빨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최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 침략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국주의 서양의 침략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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