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업한파 캠퍼스를 가다-(상)뒤틀린 취업 현장

올 하반기 취업뉴스 1위는 신입사원 채용 확대였다. 하지만 올해 역시 대구 취업준비생들의 성적은 'F 학점'에 가까웠다. 최고 600대 1에 이르는 경이적 취업경쟁률에다 토익 960점(만점 990점)까지 탈락하는 '바늘구멍'에 대구 청년 실업자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대학은 휴학생으로 붕괴되는 반면 학원가는 밀려드는 고시생으로 급팽창하고 있다. 2004 대구 취업의 '그늘'을 찾았다.

◇대학 8학년

24일 경북대 인문대에서 만난 대학 7학년 박모(26·98학번)양은 올해도 졸업을 미뤘다. 두 번의 휴학에 복수전공….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2002년 졸업했을 박양은 지난 3년간 졸업을 유예하며 취업 준비에 매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천 전 1천 패. 인문대, 사회대 등 문과계열엔 박양처럼 지금까지 낸 입사 원서만 1천장 안팎에 이르는 취업준비생들이 허다하다.

"인문대는 말이 좋아 대학의 지성이지 전공 특성상 기업에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경영학 등 복수전공을 통해 실력을 쌓으면서 어떻게든 졸업을 연장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올 하반기에만 100차례 이상 원서를 넣었으나 모두 실패한 박양은 마지막 한 학기를 또 휴학할 예정이어서 내년엔 8학년이 된다.

대학가의 무더기 휴학은 취업 한파가 불어닥친 지난 1998년부터 시작됐다. 바로 '모라토리엄족'. 자금 상환을 연장하듯 졸업을 유예하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한 것.

같은 날 인문대 11개과 조교들을 만나 여대생 휴학 실태를 들었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인문대는 여대생 모라토리엄족들이 특히 많다. 조교들은 5,6학년은 기본이고 7,8학년까지 다니는 여대생들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ㄱ과 경우 졸업을 택한 15명의 여대생 중에는 8학년으로 파란만장했던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는 97학번 1명에 7학년(98학번) 3명, 6학년(99학번) 1명, 5학년(2000학번) 10명 등이 포함돼 있다. 4학년(2001학번)으로 졸업하는 학생들은 한 명도 없다. 2005년 2월 졸업하는 233명의 인문대 여대생 중 4학년 졸업예정자는 불과 60명(25.7%)에 불과하다.

ㄱ과 조교는 "삼성, 현대 등 대기업들의 '졸업생' 응시 제한 실시는 기름에 불을 놓은 격"이라며 "어떻게든 졸업을 연장하려는 학생들이 대거 휴학한 결과"라고 말했다.

ㄴ과 조교는 "34명의 졸업예정자 중 정상적으로 취업에 성공한 여대생들은 아예 없고 어문계열 학원강사로 진출한 학생들만 20~30%에 이른다"고 말했다.

◇유목민

70% 이상의 높은 취업률을 자랑하는 전문대생들은 높은 취업률과 취업의 질은 전혀 딴판이라고 하소연했다. 지난 23일 대구 시내 모 마트에서 만난 조용철(26·98학번)씨는 용역업체 직원으로 월 100만원도 받지 못하는 신세다. 학교에서는 취업자로 분류됐지만 실은 아르바이트생이나 마찬가지.

"동기들 중 상당수는 계약직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1,2년 정도 계약직으로 일하다 카드채권추심단, 이벤트, 유통업체 등을 전전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조씨는 "정원이 120명에 이르는 과 동기 취업률은 90% 이상이지만 속내는 90% 이상이 계약직, 비정규직"이라며 "정말 취업이 잘 됐다면 지난해 과 이름을 바꾸고 정원까지 절반으로 줄일 이유가 없다"고 씁슬해 했다.

대학가에서는 조씨처럼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으로 단기간 일하다 이 직장, 저 직장으로 떠도는 청년들을 노마드(유목민)족이라 부르고 있다.

25일 ㅇ전문대에서 만난 김모(25·99학번)씨 경우 취업자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 계약직으로 떠돌고 있다고 했다. 전문대 취업률이 높다고 하지만 1주일 중 최소 1시간 이상만 일해도 취업자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철새 공·시·생'

5년째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모(30·ㄱ대 95학번)씨는 '철새 공시생(7·9급 공무원시험준비생)'이다. 지금까지 30여 차례의 공무원 시험을 치르는 동안 10번 이상 거주지를 이전했다.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방직 응시자는 그 지역에 본적이 있거나 거주할 경우에만 시험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공무원만 될 수 있다면 고향이 아니라도 좋다"고 말했다.

대구 ㅎ공무원고시학원이 25일 수강생 700여명을 대상으로 거주지 이전 유무를 조사한 결과는 이같은 현실을 잘 반영한다. 거주지를 이전한 적이 있다고 대답한 수강생은 모두 30%에 이르고 이 중 2번이 2.6%, 3번 이상도 5.1%에 이르고 있다. 거주지를 이전한 적은 없지만 앞으로는 그럴 생각이 있다고 응답한 수강생도 37%나 된다.

공시생은 왜 고향까지 바꿔가며 공무원 시험에 매달릴까. 지모(28·4년제 컴퓨터공학과 96학번)씨는 "공무원만큼 안정적인 직업이 어딨냐"고 반문했다. 아무리 좋은 기업에 취업해도 50세를 넘기지 못하는 시대 현실을 감안할 때 공무원만큼 미래가 보장되는 직업은 없다는 것이다. 지씨는 "오전 6시 30분에 학원으로 '출근'해 수업을 듣고 이후 자습실에서 예·복습을 하며 밤 10시에 '퇴근'하는 등 '고3'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학원 김정명 원장은 대구·경북의 공시생 열기는 서울을 제외한 한강 이남에서 단연 최고라고 전했다. 7·9급 공무원학원만 7개로 치열한 학원 경쟁 때문에 최근 두달 수강료가 35만원 선에서 딱 절반으로 줄어들 정도라는 것.

ㄱ경찰고시학원 이대욱 실장은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순경' 고시도 대단하다고 했다. 특히 전체 수강생의 25%를 차지하는 여경 응시생들의 경쟁은 상상을 초월해 지난 10월 5명을 뽑은 대구지방경찰청 여경 공채에는 393명이 도전해 78.6대 1의 사상 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는 것.

◇고시 폐인

24일 고시원이 밀집한 경북대 북문 인근의 모 PC방.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에도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PC방 종업원은 새벽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절반 이상이 인근 고시원에 거주하는 '고시 폐인'이라고 귀띔했다.

경북대 일대에 밀집한 고시원은 대략 30여개. 고시원마다 20~3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고 이 중 절반 정도가 대학 졸업생들이다. ㅇ고시원 관계자는 "공시생들이 대부분"이라며 "시험에 지친 상당수 공시생들이 PC방에서 밤새 게임을 하고 있다 "고 말했다.

고시 폐인을 자처한 박준상(30·ㄷ대 94학번)씨는 "추석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친구, 가족 등 지인들과 담을 쌓은 채 게임세계에만 몰두하는 폐인들은 이미 3, 4년 전부터 고시원을 점령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고시원 관계자들은 취업난으로 공시생들이 늘어나면서 고시원 숫자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경북대 북문 경우 최근 1, 2년 새 초현대식 건물에 인터넷, 케이블TV 시청이 가능한 일명 '고시텔(고시원과 호텔의 합성어)' 2곳이 문을 열었고, 현재 건물을 짓고 있는 고시텔도 3, 4곳에 이른다.

고시원 관계자는 "올해 경북대 근처에 문을 연 2곳의 여성전용고시원 경우 입주율이 100%"라며 "갈수록 심화되는 여대생 취업난을 고려할 때 여성전용고시원의 집단화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기획탐사팀=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사진설명 : 25일 오전 대구전시 컨밴벤션센터에서 개막된 2004 대구 경북 직업훈련.자격 취업박람회장에 온 구직자들이 채용정보관에서 구직면접을 하고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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