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화요포럼-북한에 완승한 우리 토지개혁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1월 18일 칠레방문 중 "이승만 대통령 때 토지개혁, 농지분배라는 획기적 정책을 편 덕분에 한국전쟁에서 국민이 하나로 뭉쳐 체제를 지켜냈다"고 말한 바 있다.

언론들은 대부분 이 말을 일과성 보도로 지나치고 말았지만 그러고 말기엔 아쉬움이 남는 화두라고 생각되어 여기 상론해 본다.

토지개혁은 원래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이다시피한 것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하자 레닌이 곧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우파 세력을 몰락시킨 것이 그 전범(典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유럽이 공산화하면서 이를 따랐고 1949년 수립된 중국 공산정권도 이듬해 이를 따랐다.

물론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6년 2월 8일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사실상 '북한만의 단독정권' 수반이 된 김일성은 집권 첫 사업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3월 5일에 토지개혁법령을 공포, 20일 만에 이를 해치웠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농민의 농지소유는 몇 년 뒤(53~58년) 농업협동화가 강행되면서 허황한 것으로 되고 말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당시 농지 획득자들은 환호하고 감격했다.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킨 데는 토지개혁에 대한 수혜농민들의 환호성이 한 자극제가 됐을 수도 있다.

김일성은 6·25 한 해 전인 1949년 소련으로 스탈린 수상을 방문, "우리가 38선을 침공하면 곧 남한 전역에서 친공내란이 일어나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면서 남침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다(1970· 흐루시초프 회고록). 이것은 북한이 토지개혁을 한 것을 잘 알고 있을 남한 빈농이나 소작인들이 북한 남침 시 동조 폭동에 대거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한 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실제 남침이 일어난 후 남한 농촌은 어떠했는가?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입성한 북한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이 방송을 통해 "모든 남반부 인민들은 어째서 총궐기를 안 하십니까… 적의 후방에서는 하나도 폭동, 둘도 폭동, 셋째도 폭동입니다.

전력을 다해 대중적 폭동을 일으키십시오."라고 호소했지만 기존 공산주의자 말고는 아무 호응이 없었다.

왜일까? 대한민국 건국세력과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앞을 내다보는 신통력이 있었는지 토지개혁 방침을 이미 국민에게 공표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당시 남한의 경지면적 중 자작농지는 37%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소작농지였다.

또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 중 자작농은 14%밖에 되지 않았고 반소작농이 35%, 소작농이 49%였다.

이런 토지소유구조로는 신생공화국의 국민적 일체감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 건국세력들은 1948년 헌법을 제정할 때 "농토는 농민에게 분배한다"(제86조)고 명시했으며 이에 따라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을 만들었다.

그 후 일부 미비조항이 있어 1950년 3월 10일 이 법을 개정하고 3월 25일엔 시행령을, 4월 28일엔 시행규칙을, 그리고 6월 23일엔 '농지분배 점수제규정'을 제정했다.

이렇게 되고 나서 이틀 뒤 6·25전쟁이 일어났으니 역사의 시계가 실로 숨 가빴다고 할까.

전쟁 전에 토지개혁 계획을 확정 공포한 것은 전쟁기간 중의 민심 동요를 막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수혜농민들이 낼 땅값은 일제 때 4분의 1 수준인데다 그것마저 5년간 곡물상환이라고 했으니 거의 부담이 되지 않았다.

이 조치들은 전쟁발발로 완결이 늦어졌으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지금 농촌에 더 이상의 지주계급은 없고 거의가 자작농이라는 사실이 그 성공을 증거한다.

그리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고수하여 부자들을 비농업분야로 몰아간 것도 나라를 농업국에서 고도산업국가로 변모시킨 큰 요소였다고 하겠다.

또 하나 이때의 토지개혁이 돋보이는 것은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마련인 이 개혁을 자유민주주의적인 원칙 아래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시켰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집단농장화 과정에서 적어도 2천만 명의 지주가 학살됐으며 중국의 농지개혁에서도 5천만 명 이상의 농민과 지주가 죽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정확한 사망자 통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당시 23만 명의 지주 중 15만 명의 지주가 남하한 것을 보면 토지개혁을 둘러싼 아수라와 유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난리 끝에 북한농민에게 돌아온 것이 오늘의 심각한 식량난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남한은 토지개혁의 남북대결에서도 북한에 완승을 거두었다고 본다.

우리 모두 자학이 아닌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시(正視)하자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최재욱 전 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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