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버버리 찰떡'을 아십니까.
시장통에 장꾼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이들의 최고 간식으로 한시절을 풍미하다 1970년대 후반 자취를 감췄던 안동 '버버리 찰떡'이 다시 등장했다.
이 찰떡은 비교하자면 경주의 '황남빵' 같은 존재.
1930년대 안동시 안흥동 구 경북선 철도변에서 김노미(당시 50세)씨가 만들어 팔았던 것이 원조다.
김씨는 주로 열차 손님들을 상대로 찰떡을 팔다 한국전쟁 직후 안동시 옥야동 신시장(중앙시장)가로 가게를 옮겼다.
찹쌀로 지은 떡밥을 떡매로 쳐 떡살을 만든다음 손바닥 크기로 잘라 양면에 팥고물과 콩고물을 입혀 2종류로 만들어 내는 이 찰떡은 감칠 맛은 물론 한개를 세번을 베어 먹어도 못다 먹을 정도로 푸짐했다.
어렵던 시절 5일장에 나온 나뭇짐 장수와 소 장수 등 장꾼들에게는 헐값에 배를 채울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장 보러 나온 아낙들도 가족들에게 가져다 주기 위해 이 찰떡을 사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장보기였다.
점심시간 무렵 이 떡집 앞에는 찰떡을 사려는 사람들로 항상 장사진을 쳤다.
장보러 온 영양, 청송 사람들도 가세할 정도였다.
허술한 판자집에 상호도 없던 떡집,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버버리 찰떡집'이라는 상호가 생겼다.
'버버리'는 벙어리의 안동 사투리다.
할머니의 가까운 친척 중 말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하여 떡사러 온 사람들이 '버버리'네 찰떡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따라 불렀다.
60년대 들어 기력이 떨어져 손을 놓은 원조 할머니 대신 찰떡집일을 이어 받은 사람은 외손녀인 천영수(71)할머니와 한집에서 살았던 김동순(75)할머니 였다.
유명세를 그대로 이으며 두사람은 70년대 후반까지 떡집을 지켰다.
그러나 온갖 먹을거리가 등장하면서 찰떡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줄었고 천할머니가 도시로 나간 아들과 합가하기 위해 안동을 떠나면서 찰떡집은 문을 닫았다.
원조 할머니의 일을 도우며 기술을 배웠던 몇몇 사람이 아류의 찰떡집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이맘때 전후 비슷한 사연으로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들어 이 찰떡을 안동의 전통음식으로 되살리자는 여론이 일었다.
앞장선 신모(48)씨가 수소문 끝에 두 할머니를 찾아 취지를 설명하고 다시 찰떡을 만들고 기술을 전수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한달 전부터 이들 할머니는 옛 떡집과 지근거리에 다시 떡집을 차렸다.
거짓말 같이 사람들이 몰렸다.
옛 추억과 찰떡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루에 찹쌀 한가마니를 거뜬히 소비할 정도로 찰떡이 팔린다.
"늙고 힘에부쳐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젊은 사람이 질리도록 부탁을 해서 다시 떡칼을 쥐었다" 는 두 할머니는 버버리찰떡이 다시 유명해 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며 신씨에게 기술만 가르쳐 주고 미련없이 손을 놓겠다고 한다.
신씨와 안동시, 안동시의회는 이 찰떡을 안동전통음식으로 육성해 상품화 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관련 시조례를 제정할 계획이고 앞서 상표등록은 마친 상태다
시민들이 반기는, 안동의 명물이 부활하는 셈이다.
안동·정경구기자?jkg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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