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잊혀진 문화유산-흥덕왕릉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는 왕릉의 도시다.

무열왕릉, 경덕왕릉, 성덕왕릉, 헌덕왕릉, 일성왕릉, 탈해왕릉, 문무왕 수중릉에다 대릉원, 괘릉, 삼릉, 오릉 등 숱한 왕릉과 고분이 역사의 애환을 그대로 담고 있다.

현재 경주에 흩어져 있는 왕릉과 고분은 줄잡아 30여개. 그 가운데서도 유독 흥덕왕릉(사적 30호)은 '잊혀진' 유적이다.

다른 왕릉이나 고분은 당시나 지금이나 경주 시내 한가운데 있거나 최소한 그 언저리에 있지만 흥덕왕릉은 안강벌 한가운데 포항 쪽에 유배된 듯한 느낌을 준다.

안강읍 육통리 소사육 농가 밀집지인 동네 한가운데, 족히 수천 그루는 넘어 보이는 소나무 숲속에 갇혀 마음먹고 찾아보지 않으면 쉽게 모습조차 내보이지 않는 곳에 흥덕왕릉은 자리잡고 있다.

한 그루도 바로 선 것 없이 기울어지고 틀어진 소나무 숲을 호위병 삼아 자리잡은 왕릉은 소담스러우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위엄을 풍긴다.

왕릉 앞에는 이끼 낀 한 쌍의 문인석과 무인석이 마주하며 섰고, 돌사자 같은 석물도 자리를 잡았다.

특히 울창한 소나무숲을 뒤로 한 채 왕릉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인석은 곱슬머리에 눈이 깊숙하고 코가 크면서도 우뚝한 모습이 듬직하다.

둘레 20m에 높이가 6m는 넘을 듯한 봉분 밑둘레에 세운 호석에 조각된 십이지신상은 상당한 예술성을 느끼게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무덤 속에 누워있는 신라 42대 흥덕왕은 요즘에도 흔치않을 순애보의 주인공이다.

서기 826년 왕이 되어 836년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재위한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 장화부인을 잃었다.

많은 신하들이 재혼을 권했으나 그는 "앵무새가 짝을 잃어도 슬퍼하는데 어찌 사람이 짝을 잃었다고 곧 다시 아내를 맞겠느냐"며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홀로 지냈다.

훗날 그는 '나 죽거든 아내와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래서 지금도 합장된 흥덕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장화부인)가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얘기한다.

흥덕왕은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서해를 방어하게 했고,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 자락에 심게 해 우리나라 차 문화를 일으킨 업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흥덕왕릉의 지금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이미 수 차례나 도굴된 데다 진입로조차 제대로 없다.

어떤 이들은 "조촐하고 소박한 지금의 모습이 왕릉에 얽힌 얘기와 더 잘 어울린다"라고도 하지만 왕릉의 관리상태로는 부족함이 많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왕릉을 탑돌이하듯 도는 이 마을 노인네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쓰레기를 줍고 잡초도 뽑아내고 있다

1천200년 간 변함없는 사랑을 나누고 있는 흥덕왕 부부는 '후세들에게 짓밟히기보다는 숨어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거나 '경주 시내의 다른 왕릉처럼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상이한 보존방안을 놓고 설전을 벌이는 후세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경주·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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