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이번 글 주제는 '양아치 보수'와 '얼치기 진보'로 정했었습니다. 바가지가 아니라 말(斗)로 욕먹을 각오도 단단히 했지요. 그런데 마음을 바꿨습니다. 연말 연초를 조용히 보내고 싶다는 가족의 권유가 있었고 교수신문이 올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옳고 그름을 떠나 한 무리에 속한 사람이 다른 무리에 속한 사람을 무조건 공격한다'는 당동벌이(黨同伐異)를 선정해 선수(先手)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또 한 해를 정리하는 마당에 덕담이 아니라 비판으로 도배하는 것도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대신 지난 12월16일 매일신문 6면에 게재됐던 칼럼 '세풍-투전판 자본주의의 그늘'을 다시 정리해 올립니다. 원래 이 원고의 초고는 30매 가까이 됐으나 지면 사정상 11매 정도로 줄이다 보니 할 말을 다 못한 면도 있고 글이 어려웠다는 반응도 있어 다시 쓴다는 생각으로 고쳐 썼습니다.---보리수염
요즘 입 달린 사람마다 살림살이가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국내외 경제 예측기관들마다 내년 한국경제는 올해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국민들도 자신감을 잃은 인상이다. 정부도 믿지 못하는 눈치다. 정치권은 4대 입법을 놓고 팽팽히 대치하고 있고 경제정책은 오락가락, 갈피를 종잡을 수 없다. 여기에 빈부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계층 간 갈등이 위험 수위에 육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을 성장잠재력 저하에서 찾는다. 성장률 저하→고용 감소→소득․소비 감소→투자 위축→고용 감소라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한국경제 위기 심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세계의 공장' 중국의 부상에 따른 '중국 블랙홀론', 분배를 우선시 하는 '참여 정부'에 대한 대기업들의 '자본 스트라이크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자본시장 자유화에 따라 한국에 들어온 외국 투기자본의 득세가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주장도 세를 얻고 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한국경제의 경쟁력 저하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도입으로 자본과 노동 등 생산요소의 국제적 이동이 종전 보다 훨씬 자유로워지고 빨라졌다. 이로 말미암아 자본과 상품, 노동시장의 경쟁이 전 세계적으로 펼쳐지면서 격화된 반면 우리 산업의 국제경쟁력은 반도체와 휴대폰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경제가 중국 등 후발 개도국의 거센 추격에 따라잡히고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도 줄이지 못해 성장동력을 잃고 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국내 자본이 보다 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산업 공동화 우려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투자가 위축되면서 고용사정이 악화되고 소득이 줄다보니 소비와 투자가 감소해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의 특성을 알아둘 필요성이 나온다. 자본에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인정(人情)이 없다. 오직 이윤만이 있을 뿐이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어 월경(越境)이 자유롭다. 대부분의 나라가 자본에는 여권도 비자도 요구하지 않는 특혜를 준다. 더욱이 오늘날 자본의 이동속도는 눈부시다. 빛의 속도에 버금간다. 정보통신 혁명 덕분이다. 투기 자본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거대한 '노름판'을 벌일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노름판은 클수록 좋다. '판돈' 많고 '배짱'있는 자가 '장땡'이다. 투기 자본은 이제 국가기구를 능멸할 정도다. 우리 정부가 환율 방어를 한다며 날린 수조 원을 누가 먹었는가. 모두 환투기 자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한국도 외환위기 이후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를 도입하면서 금융시장을 개방했다. 외국인 자본의 한국 주식시장 점유율이 43%에 이르고, 주요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외국인 주식 보유비율은 60%를 상회한다. 외국인 자본의 유입으로 우리 금융시장이 종전보다 투명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 투기자본의 공격에 그만큼 취약성을 안게 됐다. 일부 투기성 외국인 자본은 M&A 시도를 통한 경영권 위협, 상식을 벗어난 고배당 요구, 유상감자 같은 변칙적인 자본 회수 등으로 기업 이윤을 갈취하고 있다. 이에 위축된 우리 기업들은 외국 자본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중장기 투자 계획은 엄두도 못 낸다. 돈을 쌓아 놓았지만 투자를 못한다. 이러니 고용창출도 부진할 수밖에 없고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있다. 외국계 자본이 지배하는 은행들 역시 대출금 회수 위험이 높은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고 있다.
보다 못한 정부가 국민의 쌈짓돈인 연기금을 증시에 투입하겠다고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국민들이 소비를 줄이는 대신 저축을 늘리는 요인이 됐다. 연기금 투입이 오히려 소비진작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루쉰(魯迅)의 얘기처럼 '물에 빠진 개를 살려놓으니 오히려 물려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연기금으로 투자된 주식에 의결권을 못 주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기업의 경영권을 지배해 간섭할 우려가 높다는 이유다. 핑계는 잘도 갖다 붙인다. 외환위기 당시 국민의 혈세로 위기를 넘긴 사실을 벌써 잊은 것으로 보인다. 또다시 방만한 경영을 일삼아 국부를 탕진해도 그냥 보고 있으란 말이다. 루쉰식 처방대로 한다면 이들에겐 줄 약은 몽둥이뿐이다.
국내 자본은 경쟁력 저하로 세계시장에서 초과 이윤을 얻지 못하자, 다시 예전 수법을 들고 나왔다. 부동산으로 한 몫 잡겠다는 발상으로 '기업 도시'를 비롯한 각종 부동산 투기정책을 내놓고 경기부양에 발목잡힌 정부를 상대로 흥정을 벌이고 있다. 부동산 보유세와 양도세 중과 등 부동산 투기 규제정책에 '어깃장'을 놓는 세력은 모두 이들이다. 중산층도 부동산 투기 바람에 가담했으나 오른 것은 집 값이고 남은 것은 은행 빚뿐이었다. 이로 인해 중산층마저 소비여력이 없어 소비 침체의 주원인이 되고 있다.
이 판에도 저 판에도 끼지 못한 저소득층은 어디로 갔을까. '로또'다. 복권만이 '인생 역전'의 희망이 된 것이다. 알다시피 '복권은 가난한 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세금'이다. 814만 분의 1 확률에 목숨을 건 저소득층의 피땀 섞인 돈은 누가 가져갔을까. 정부는 로또 이익금의 사용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돈 놓고 돈 먹기인 '투전판 경제'는 경기 양극화와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단결할 리 만무하다. 분열과 파괴, 저주, 증오의 종소리만 요란하다. 화합과 창조, 사랑은 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하게 됐다. 이젠 다시 환란이 닥쳐도 자발적으로 금을 모으겠다고 나설 국민도 없다. 금을 모았으나 배부른 자들의 배만 더 불리고 일반 국민들의 배는 더 고팠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국민들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지 않는가.
기나긴 인류 역사에서 다수 인민이 골고루 배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요즘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는 너무 심하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더욱 극심해졌다.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한다고 비난받고 있는 '참여 정부'아래서도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다.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10% 소득의 9배다. 그러나 '참여 정부'는 분배정책을 실시하지도 않고 욕만 얻어먹었다. 실제 요즘 정부가 내놓는 정책을 보면 선(先)성장 후(後)분배론자들의 논리를 추종하는 것으로 보인다. 감세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에게 돌아갔고 간접세 비중을 갈수록 높이고 있는 게 대표적 사례다.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마저 왜곡하고 있는 정부가 어떻게 분배를 우선하는 정부인가.
소득은 준 반면 세금은 늘어나니 쓸래야 쓸 돈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소비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내수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아우성이고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 가계도 30%나 돼 1천400만 명이 생활고에 허덕이는 상황이다. 여기에 저소득층은 생존권까지 위협받고 있다. 반면 부유층은 국내에선 지갑을 닫는 대신 해외로 나가 돈을 뿌리고 있다. 근로 계층 내에서도 경기 양극화로 기업 규모별, 업종별로 소득 격차가 벌어져 위화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하위 계층의 계층 상승기회가 박탈되고 있다. 소득 상위 계층에서 이른바 명문대와 사법시험 합격자를 대거 배출하고 있다. 반면 하위 계층은 경기 침체의 장기화로 교육비 지출까지 삭감하는 형편이다. 균등한 교육기회마저 박탈당하면 하위 계층의 상위 계층으로 이동은 더욱 힘들어 진다. 부의 세습이 계층 고착화로 이어져 활발한 계층 이동이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의 강점이었던 역동성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분배냐, 성장이냐는 논란에서부터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색깔 논쟁만 벌이고 있다. 국민만 잘 살면 되지, 좌파면 어떻고 우파면 어떠냐. 색깔론을 '정치 밑천'으로 하는 자들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黑猫白猫論)'고 주장한 저승의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보내 특별과외를 시키고 싶은 심정이다. 노동계도 오십보 백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울음을 정규직 노조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제 발등에 불'이 아니고 '강 건너 불'이라는 것이다.
2004 갑신년은 산업간·기업간·계층간 양극화의 골이 메울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 해였다. 이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민심이 갈가리 찢기고 있다. 이 상태에서 잠재성장률을 초과해 매년 5%이상씩 성장할 수 있을까.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선다고 국민들이 2배로 행복해할까. 아닐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경제적․사회적 민주화를 달성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을유년 새해에는 불신과 절망 대신 믿음과 희망과 악수하고 싶다.
조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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