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라는 책은 성리학의 두 거봉 이황과 기대승이 27년이라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퇴계 이황 선생이 157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나눈 편지 모음집이다.
이 모음집에는 퇴계 선생과 고봉 사이에 나눈 사단칠정론이 들어 있다. 이기이원론으로 유명한 퇴계의 이론과 이기일원론으로 퇴계의 이론을 논박한 고봉의 이론이 편지형식으로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을 구성하는 이-기, 그리고 성-정, 사단-칠정 등의 논의를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편지모음집은 이러한 이론만이 아니라 남을 이기기에만 급급한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 등도 들어 있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오늘날로 치자면 국립대 총장 격인 퇴계 선생이 나이가 한참 어린 고봉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제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이다.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기대승 자신이 뛰어난 이론가인지라 그럴 법도 하다지만 학문과 타인의 인격 앞에서 대사성이라는 사회적인 신분과 나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후학의 비판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퇴계 선생의 모습은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준다.
그래서 필자 또한 교수라는 직함이나 권위를 타인에게 은근히 강요하지 않았는지, 학문보다는 연공서열을 더 중시하진 않았는지, 학문을 권력과 돈의 도구로 삼진 않았는지, 학문의 질 향상에 힘쓰기보다 쓰레기 같은 논문들의 양산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못 반성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지난 연구년 기간 동안 필자는 영국 캠브리지대 도서관에서 복도마다 가득 메운 어느 서가 앞 의자에 앉아 열심히 토론하던 교수와 학생 두 사람의 모습에 감동받은 적이 있다. 바닥만 맨들맨들할 뿐 우리네 대학 도서관에는 여유있게 앉아있을 의자도 없을 뿐더러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불가능하다. 두 학자가 아무런 사심과 겉치레, 립서비스와 위선 없이 학문을 논했던 약 5백년 전의 그 순간이 이젠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이득재·대구가톨릭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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