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한자-丹心歌(단심가)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也歟 (영유개리야여)

此(이 차) 身(몸 신) 死(죽을 사) 了(마칠 료) 一(한 일) 百(일백 백) 番(번 번) 更(다시 갱) 骨(뼈 골) 爲(될 위) 塵(티끌 진) 土(흙 토) 魂(넋 혼) 魄(넋 백) 有(있을 유) 也(어조사 야) 無(없을 무) 向(향할 향) 主(주인 주) 片(조각 편) 丹(붉을 단) 心(마음 심) 寧(차라리/어찌/편안할 녕) 改(고칠 개) 理(다스릴/도리 리) 歟(그런가 여)

*塵土:먼지와 흙

*丹心:속에서 우러나는 참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충심(忠心)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는 1231년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나, 1259년 몽고가 세운 원(元)나라와 화의함으로써 25대 충렬왕(忠烈王) 이후 31대 공민왕(恭愍王) 때까지 80여 년간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았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을 거치면서 내분이 격화되었고, 밖으로는 왜구와 북방 이민족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면서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이와 같은 정치'사회적 불안기에 고려사회의 개혁을 이끈 대표인물이 이성계(李成桂)와 정몽주(鄭夢周:1337~1392)이다.

이성계는 여말 큰 사회문제였던 왜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우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여, 우왕 14년(1388년) 요동정벌이 시작되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함으로써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성계 일파는 역성(易姓)혁명에 앞서서 정몽주를 포섭하거나 제거하는 선택의 문제로 고민하였다. 바로 이때, 훗날 조선의 태종이 된 이방원이 정몽주의 진심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읊은 에 대한 정몽주의 대답이 인 것이다.

정몽주는 호가 포은(圃隱)으로, 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포은은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직접 토벌하는 등 무공도 갖추었으며,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는데도 앞장섰다. 또한 외교적 수완도 뛰어나 여러 차례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였고 잡혀간 수백 명의 고려인들을 귀국시켰으며, 긴장상태였던 대명외교도 훌륭하게 풀어나가는 등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조준, 정도전, 남은 등 급진적인 개혁파들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고 결국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미 기울어 가는 고려이지만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로 표현한 것이다. 즉, 자신과 역사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명분을 빌어 드러낸 것이다.

자료제공 : 장원교육 한자연구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