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며칠째 덕담(德談) 속이다.
휴대전화나 이메일은 가히 그 세례로 넘쳐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나 짤막한 메시지는 삭막해져 있는 마음에 짜릿한 전율을 안겨주는 경우도 있다.
몇 해 전부터 속도가 붙고 있는 현상이기는 하나, 심지어 아날로그 세대까지 눈에 띄게 가세하고 있을 정도로, 연하장이 현격히 준 대신 휴대전화 메시지들은 크게 늘어나 '달라진 세상'을 실감하게 된다.
◇ 덕담이 품은 '신비스러운 힘'
아무튼 상투화됐다고 하더라도, 덕담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을수록 좋은 미풍양속(美風良俗)임에 틀림없다.
들을 때도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할 때는 기분이 더욱 고조되는 걸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덕담이란 단순히 '그렇게 되십시오'라고 축원하는 데 끝나지 않고, '이미 그렇게 되셨으니 고맙습니다'라는 언령관념(言靈觀念)이 배어 있다고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은 풀이한 바 있다.
그런 것 같다.
분명 말에는 그렇게 되라고 하면 그렇게 되어지는 어떤 '신비스런 힘'이 들어 있다
그래서 그럴까. 새해 덕담 나누기는 지구촌의 공통적인 풍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그 빛깔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미국에서는 '해피 뉴 이어'가 대변하듯 '행복(幸福) 추구'가 주요 덕목(德目)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쿵시화차이(恭喜發財)'처럼 재물(財物)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배어 있는가 하면, 일본에선 '새해가 시작되니 축하합니다'라는 인사가 주류이듯이, 상대적으로 보면 다소 추상적인 빛깔을 띠고 있는 경우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으뜸인 모양이다.
'복(福)'이라는 말에는 재물·출세·자식·부인·남편 복 등 많은 의미가 두루 포함돼 있기 때문일까. 게다가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는 '복'이라는 추상성 뒤에 구체적인 덕목이 보태지면서, 득남·건강·치부·승진 등 상대방의 처지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덕담은 세태의 변화와 맞물리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몇 해 전부터 '부자 되세요'가 회자(膾炙)돼 우리의 가치관에도 '물질적 풍요'가 주요 미덕으로 자리매김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이 가치관은 절대빈곤층이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정치권에서 수백 억대의 돈이 오가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나 박탈감과도 무관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올해는 한동안 바람을 일으켰던 '부자 되세요'라는 말마저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날로 어려워지는 경제 사정과 서민들의 얇아지는 주머니 탓으로 그런 소망마저 시들해져 버린 건지, 아예 포기해 버렸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물신주의(物神主義)나 배금주의(拜金主義)가 지양되거나 극복된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사실 평소 우리 사회에는 악담(惡談)이 덕담을 뒤덮고 있는 형국이다.
남을 속이고 해치고 아픔과 슬픔을 주는 말들, 실현 가능성과 동떨어진 허언(虛言)이나 구두선(口頭禪)들이 난무하고 있다.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가 하면, 그 폭력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사람은 비수를 가시 돋친 말 속에 숨겨둘 수 있다'고 했지만, '마음의 소리'이며 '정신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말이 새해 덕담처럼 일상에도 널리 확산될 수는 없을는지….
올해도 해바라기를 하기 좋은 전국 곳곳에서는 인파가 넘쳐났다고 한다.
남에게 '부자 되세요'라고 말할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처지게 했던 한 해를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안고 새해의 새 빛을 열망하는 행렬이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만성화된 실업, 최악의 경기 침체, 그 끝이 안 보이는 정국 불안과 흔들리는 사회 안전망,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災殃) 등은 우리를 여전히 옥죄고 있기 때문이리라. 젊은이들의 경우 절박한 상황에서 더더욱 자유롭지 않다.
수십 차례 취업문을 두드렸으나 면접마저 한두 번 봤을 뿐이었다는 누군가의 고백은 그 사정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 '따뜻한 세상 만들기' 나서야
'패거리 짓기'에 눈이 어둡고 '내 탓이오'가 실종돼 버린 듯한 권력층, 민생(民生)과 상생(相生)을 저버린 채 힘 겨루기를 일삼는 정쟁(政爭), 갈등과 대립, 경제적 고통의 먹구름과 골이 깊이 파이기만 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개인이나 집단 간의 '막무가내'식 이기주의…. 우리 사회는 그렇게 뒤틀리고 병들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힘 있고 가진 사람들부터 '따뜻한 세상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잘못은 '내 탓이오', 잘되면 '남의 탓'인 너그러움을 회복하면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참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덕담'이 일상화(日常化)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정녕 그래야만 한다.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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