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한 소년이 달음박질한다. 소년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을 떠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 하나만 부둥켜안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영화 '역도산'의 첫 장면이다. 그 소년은 반세기전 일본에서 '천황 다음 역도산' 이란 말이 생길 만큼, 유명세를 떨친 프로레슬러 역도산이다.
그는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에서 죽을 각오로 견디어야 했다.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야 했던 그는 도중에 쓰러질 수조차 없는 자수성가의 외길을 걸었다. 그러나 조선인은 스모의 최고 경지인 '요코즈나'에 오를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 앞에서, 무쇠 같던 역도산도 자포자기의 방황을 한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듯, 절망 속의 그에게 기회가 온다. 프로 레슬링이라는 생소한 스포츠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실력 위주의 경쟁 문화 속에서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며 명성을 떨친다. 금의환향한 역도산은 일본에서 화려한 데뷔경기를 한다. 거구의 미국 선수를 '가라데 촙'으로 통쾌하게 때려눕히는 장면은 전후 실의에 빠진 일본인을 감동시키며, 국민적 영웅이 된다. 그가 재일 한국인이었음을 아무도 몰랐다. 걸림돌만 되는 조선인이라는 국적을 철저히 숨겨야했다.
그러나 '역도산의 신화'는 쾌락적 상업주의의 속임수였다. 경기 전, 역도산은 상대 선수에게 돈 봉투를 건네어 대가를 지불했던 것이다. 이처럼 역도산은 진정한 스포츠맨이라 하기에는 구린 구석이 많았고, 최고가 되기 위해 어떤 비열함도 불사하였다.
지난 날 온갖 수모의 벼랑으로 내몰았던 일본인의 흠모의 대상으로 군림하게 되었지만, 역도산에게 그들은 한순간도 믿을 수 없는 박해자일 뿐이었다. 역도산이 자신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세계인' 임을 자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존경쟁과 거짓된 삶의 팽팽한 외줄타기에서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의 인생을 삼켜버리고, 피해 사고와 과대사고의 '파라노이아(완고한 망상이 지속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삶의 권태와 고뇌로 점차 붕괴되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고 감시한다는 극심한 불안 상태에서, 익명의 남자를 폭행하다가 칼에 찔려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과민성과 열등감이 투사되어 우월감과 과대사고에 사로잡혀 살다간 역도산. 그의 열등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일이 없는 인생을 상상할 수가 없다. 참된 행복한 삶은 개인의 노력과 국가의 보호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국민은 누구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개혁과 발전의 입구에서, 정신없이 밀치고 떠밀리는 야단법석으로 오늘도 빈곤과 소외로 개인의 삶은 저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우리의 조국은 안녕하신지. 역도산의 독백이다. "조국이 내게 해준 게 뭐 있는데? 내가 조선에 남아있었다면, 내 머리통을 박살낸 총알이 미제일까. 소련제일까 고민하다 죽어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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