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업의 기 좀 살려 주세요."
미국에 있는 경북 출신의 한 공직자가 지난 4일 밤늦게 전화를 걸어왔다.
먼 이국 땅에서 쌀 협상을 지켜보며 한국 농업의 미래를 걱정하던 그였다.
식량 주권의 확보 등 우리 농업이 살아야만 하는 여러 이유들을 설명하며 "우리 농업은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던 그였다.
그동안 몇 차례의 국제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그는 "우리 농업을 살리는 마지막 보루는 국민의 의식"이라 결론지었다.
그렇다.
우리 농업은 작년 말 쌀 협상으로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르면 오는 6월부터 우리 식탁에도 수입 쌀로 지은 밥이 오르게 돼 우리 농업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됐다.
어느 학자가 갈파한 것처럼, 우리 농민들은 "물속에서 물이 턱까지 찬 상태로 서 있어 물결이 조금만 일어도 익사하게 될 지경"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우리 농업의 마지막 보루로 버텼던 쌀 시장마저 내놓게 된 때문이다.
이제 한국 쌀 시장을 겨냥해 우리 입맛에 맞게 미국 캘리포니아 및 중국 동북 3성(吉林省, 遼寧省, 黑龍江省)이나 네이멍구(內蒙古) 등에서 생산된 차진 쌀(자포니카종)이 식탁에 오를 날도 머잖았다.
한우와 함께 5천 년 역사를 상징하는 쌀 산업은 이제 바람 앞 등불 같은 처지가 된 셈이다.
우리는 지난 10년 세월 동안 102조 원을 투입하는 농어촌 구조개선 및 경쟁력 강화 등 농업살리기 사업들을 추진해 왔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급식 관련 조례만 봐도 그렇다.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자녀들에게 우수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한 예산지원 급식조례 제정 움직임이 시작된 뒤 마치 등 떠밀리다시피 극히 일부 지자체에서 겨우 결실을 거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상 국제규정 위반이란 이유로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농도(農道)를 자부하는 경북의 경우 23개 시·군 중 6곳만이 조례를 만들어 시행할 정도다.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안전농산물을 학생들에게 공급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해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는 WTO규정 등에 얽매여 조례제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것.
일본에서는 우리의 '신토불이'(身土不二) 운동처럼 '자기 고장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자기 고장에서 소비한다(地産地消)'는 캠페인과 함께 학생들에게 안전한 농산물 공급을 위해 지자체 등이 지원에 나선 지 오래다.
일부 열성 학교장은 직접 급식 재료와 맛까지 점검한다.
하지만 우리네 사정은 어떤가. 미래 우리 농산물 소비자인 학생들을 위한 이런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가. 어머니 손맛과 정성이 가득한 밥과 반찬이 제공되고 있는가. 만족스런 대답은 못 얻을 것 같다.
값싼 수입 농산물을 국산으로 속여 납품하는 등 수시로 학교급식을 둘러싼 비리가 터지는 것이 바로 그 방증이다.
우리 스스로 수입 농산물에 익숙해지도록 입맛을 길들이고 미래 소비자들을 홀대, 내모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이들이 학교 밥보다 빵이나 수입쌀 혹은 밀가루로 만든 떡볶이를 더 좋아하는 것은 왜일까? 과거 어려운 시절 미국의 밀가루원조에 의지하다 우리 밀 산업이 완전히 붕괴된 현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게다가 외식산업의 발달과 보다 많은 이익을 보려는 상혼이 맞물려 우리 농산물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는 터에 학생과 젊은이 입맛마저 수입 농산물에 길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수입쌀이 일반에 시판되고 그 양도 계속 늘어날 경우 쌀 산업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일본은 쌀 시장의 빗장을 열어도 국민이 외면하자 총리가 나서 수입쌀 소비를 촉구했던 전례도 있었다.
공은 우리 손에 넘어왔다.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공짜'라는 유혹에 빠져 안 신던 신발을 신게 된 원숭이가 그 뒤 어쩔 수 없이 '돈 주고' 신을 사 신어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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