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 운문면 신원리.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는 조용한 시골마을에선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고려시대 이후 맥이 끊긴 금자대장경 복원 작업이 그것이다.
3년째 손에서 붓을 놓지 않고 있는 허락(58)씨는 금가루로 한지에다 하루 1천800~1천900자의 불교경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하루 12시간씩 작업하기를 3년째. 준비기간까지 합하면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서울에 있는 가족들은 일 년에 2, 3차례 만나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허씨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오로지 불심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허리와 팔의 통증에 시달리지만 불심을 일으키기 위한 작업이니 한 글자라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일이죠."
금자대장경은 고려시대 호국불교의 하나로 국가기관인 사경원이 중심이 돼 제작됐으나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일부만 전해 내려온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억불정책으로 그 기법마저 사라져, 당시 금사경 제작 기법에 관한 문헌도, 계승자도 없는 상태다.
"일부 남아 있는 금자대장경을 처음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700여 년이 지나도 금방 써내려간 듯 살아있었죠. 당시 고려의 금사경(金寫經) 기술은 일본, 중국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기술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허씨의 금사경 기법 연구는 시작됐다.
금가루는 먹과 달리 종이에 두툼하게 묻지 않으면 발색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접착제의 효력이 떨어져 가루가 되기 쉽다.
또 특수 붓, 한지, 접착제를 개발하는 것도 쉽잖은 일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금가루를 이용한 사경이나 불화 제작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금의 농담이 한 글자 내에서도 제각각인 데다 발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허씨는 8년 간의 숱한 연구와 실험 끝에 드디어 적당한 필법과 한지, 붓, 접착제를 개발해 냈다.
그로부터 3년 간, 하루 12시간 금사경에 매달린 끝에 현재 70만 자를 써내려왔다.
"고도의 집중력이 없으면 오자나 탈자가 나서 애써 써놓은 사경을 버려야 할 때가 많으니 부동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글 쓰는 것뿐 아니라 한지를 잇고 책으로 만드는 일도 만만찮은 일입니다.
한치 오차 없이 경전을 이어나가고 접어야 하니까요."
허씨가 펼쳐든 금자대장경은 말 그대로 찬란했다.
가로·세로 1.1㎝의 글자로 화엄경 60만 자, 법화경 7만 자 등 총 70여만 자의 경전의 글귀가 90여 권에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작업한 장경 길이만 해도 1㎞에 달한다.
게다가 글자의 모양은 물론이고 금가루의 농담이 일정해 금빛을 제대로 내고 있어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허씨가 팔만대장경 목판본을 바탕으로 보다 정교하게 그려낸 변상도도 90여 점이나 된다.
머리카락 굵기의 선으로 촘촘히 그린 변상도와 경전의 표지만 해도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
이 작업은 허씨와 김영로(46·사업가)씨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씨의 작품을 우연히 접한 김씨가 감화를 받아 함께 금자대장경 복원을 계획했고, 최종 교정을 보는 등 물심양면으로 금자대장경 복원사업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로씨는 "금사경이 끝나는 올 3월쯤엔 서울, 부산, 대구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도 전시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비를 털어 사경원을 건립해 허씨를 후원하고 있는 그는 전시회가 끝나면 이곳에 금자대장경을 보존할 장경각을 세우고 사경을 널리 알릴 생각이다.
또 어렵게 익힌 금사경의 비법도 희망자에게 전수할 예정이다
허씨와 김씨가 이렇듯 많은 시간과 금전을 투자해 금자대장경 복원에 힘쓰는 이유가 궁금했다.
"흔히 불자는 많지만 경전을 읽고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한자 한자 혼을 불어넣은 금자대장경을 보고 사람들이 경전을 가까이하고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또 사경을 하나의 수행 방법으로 여기고 이것을 통해 불심이 생겨나고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이 대역사를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겠습니까."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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